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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기도하며/겨자씨 1564

보아도 볼 수 없는 눈 - 고경환 순복음원당교회 목사

하나님을 믿는 시종과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 않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시종은 주인에게 많은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했지만 주인은 믿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시종에게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하나님을 만져볼 수 있게 하라. 그럴 수 없다면 네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시종은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밤중에 주인 몰래 뜰에 나가 자신의 손바닥으로 땅위에 낙타 발자국을 만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주인은 시종에게 지난밤에 낙타가 왔었는지 물었습니다. 시종은 결코 낙타가 다녀가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낙타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발자국을 보았기에 낙타가 다녀간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종은 낙타를 만져보게 해주면 주인의 말을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

인생의 파도와 하나님 손잡기 - 강신욱 남서울평촌교회 목사

지난주 휴가를 맞아 해운대 바닷가에 갔습니다. 10살 막내딸은 지칠 줄 모르고 자맥질을 하며 바다를 즐겼습니다. 해운대는 파도가 제법 셉니다. 저는 키 작은 막내딸이 신경 쓰였습니다. 하지만 딸은 제 손을 잡기보다 자기 마음대로 손짓 발짓하며 헤엄쳤습니다. 그때 갑자기 높은 파도가 일었습니다. 딸아이는 얼른 손을 뻗어 제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일어섰을 때 발이 닿는 곳에서는 중심을 잡아주려는 아빠 손을 뿌리치고 마음대로 하려던 아이가 높은 파도를 만나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위험을 느끼고 먼저 아빠 손을 잡으려 한 것입니다. 막내딸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어도 아빠 손을 붙잡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비슷합니다. 내 힘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

오해 - 정학진 포천 일동감리교회 목사

어느 목사님이 교도소에 수감된 청년을 위문하러 갔습니다. 그는 자동차 절도혐의로 복역 중이었지요. “힘들지? 조금만 참아라. 자네 나오면 내가 힘껏 도와줄게.” 그러자 자동차 절도범이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 마세요. 도와주다니요? 자동차를 훔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나 하세요?” 우리는 가끔 자신의 입장에서 문제를 파악하려고 하기에 오해가 생기고 상황이 악화되곤 합니다. 폴란드 태생의 프랑스 과학자 마리 퀴리(1867∼1934) 부인은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인류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일 뿐만 아니라 물리학상과 화학상 등 두 개의 노벨상을 받은 천재입니다. 5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퀴리 부인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큰 서운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한 번도 자신을 ..

천둥 같은 첫 문장 - 한재욱 서울 강남비전교회 목사

소설가의 작품 중 가슴을 쩌렁쩌렁 울리게 하는 천둥 같은 첫 문장이 있습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이상, 날개)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여든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거북한 꿈에서 깨어나면서, 자신이 침대에서 괴물 같은 벌레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프란츠 카프카, 변신) 그러나 그 어떤 문장도 창세기 1장 1절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천둥 같은 문장이 아니라 천둥까지 만든 첫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신 후 인류와 모든 만물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

자유의 무게와 가치 - 이인선 열림교회 목사

직장 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조직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주어진 일만 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퇴사한 것을 후회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책임져야 하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선택한 자유의 무게가 직장에서 느꼈던 통제의 무게보다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의 고단함을 못 이겨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자유의 무게와 그 가치를 경시한, 위와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성경의 일관되고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종의 멍에를 멘 인간에게 “그리..

당신은 승자입니까 - 고경환 순복음원당교회 목사

미국의 저널리스트 J 하비스는 승자와 패자의 차이에 대해 말했습니다. 먼저 승자는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패자는 ‘너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또 승자는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지만 패자는 이를 적당히 합니다. 승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지만 패자는 노인에게도 고개를 못 숙입니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나 앞을 보고 패자는 일어나 뒤를 봅니다. 승자는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패자는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합니다. 승자는 과정을 소중히 생각하지만 패자는 결과에만 매달려 삽니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지만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립니다. 승자는 바람을 돛을 위한 에너지로 삼고 패자는 바람을 만나면 돛을 내립니다. 승자는 ‘다시 한 번 해보자’라는 말을 즐겨하고 패자는..

기도의 경쟁자 - 강신욱 남서울평촌교회 목사

상가 교회당에서 부교역자로 지내던 시절, 새벽기도회나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문을 잠그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어차피 마지막에 나가야 하니 그때까지 기도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여전히 기도하는 분이 있으면 다시 앉아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까지 기도하고 일어설 때면 마지막까지 기도했다는 묘한 쾌감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금요기도회 때 기도할 것이 남아서 개인 기도를 위한 음악이 끝난 후에도 낮은 음성으로 계속 기도했습니다. 음악이 끝나면 성도들이 기도를 마치고 일어섭니다. 몇몇 분의 나지막한 기도소리가 들리다 곧 적막이 흘렀습니다. 다들 기도를 마쳤나 싶어 저도 일어서려는데 어둠 속 저편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누군지 봐뒀다 나중..

새로움을 향한 영적 도전 - 이일성 군산 풍원교회 목사

‘교회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라는 자조적 비판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어제오늘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시류에 떠내려가도록 손놓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만 보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운명론에 교회를 맡길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생명입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역동성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세상 속에서 도전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땅 위의 모든 인간 조직 구성체가 가지는 약점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이론으로는 다 풀 수 없는 영적인 은혜의 기관이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중생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뜨거운 심장박동 소리를 영..

스탕달 신드롬 - 정학진 포천 일동감리교회 목사

‘적과 흑’의 저자 스탕달은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크로체교회에서 미술품을 감상한 후 심장이 뛰고 현기증이 나며 숨이 막히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유는 미술품들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이를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출 33:20)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을 보면 죽을까요. 불경해서일까요, 아니면 무서워서일까요. 한 신학자는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아름다움을 겨루는 대회입니다. 미인을 뽑는 대회지만 진(眞)이 제일 높은 위치에 있으니 아이러니합니다. 진선미(眞善美)가 아니라 미진선(美眞善)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21세기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요. 교회사는 진선..

보고 싶은 것 너머를 보는 기적 - 한재욱 서울 강남비전교회 목사

“같은 꽃을 보더라도 한의사의 눈에는 약재로 요리사의 눈에는 요리 재료로 가수의 눈에는 노래로 화가의 눈에는 그림으로 시인의 눈에는 시로 남자의 눈에는 고백으로 여자의 눈에는 낭만으로.” 이창현 작가의 도서 ‘내 마음 속의 울림’ 중 한 구절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산(山)을 산처럼 보지 않고 물도 물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사물을 볼 때 정복해야 할 대상, 심지어 돈으로 보기도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자신이 듣고 싶은 성경 말씀만 취사선택해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마치 변하지 않으려고 갑각류처럼 마음을 무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려도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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