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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기도하며/겨자씨 1564

도피와 변혁 - 강신욱 목사(남서울평촌교회)

봄이면 대학생들이 엠티(MT)를 갑니다. 우리 교회 청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엠티를 준비하며 남학생들이 콘돔을 가져가자고 쑥덕거렸답니다. 우리 청년에게도 “너는 안 가져 가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나는 혼전순결주의자야”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청년들 모습입니다. 부모님 중에 깜짝 놀랄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은 중·고등학교 때 받은 성교육을 통해 이미 익숙한 내용입니다. 다만 모른 척하며 부모님과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기독 청년들은 어떡해야 할까요. 저는 그 청년이 친구들 말에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엠티에 불참하지 않은 것이 고마웠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혼전순결에 대해 담대히 이야기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 이일성 목사(군산 풍원교회)

고백교회 설립자 중 한 분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죄목으로 2년간 옥중생활을 하다 1945년 4월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됐습니다. 히틀러 정권에 모두가 입을 다문 그때에 분연히 일어서서 양심의 입을 열었던 신앙인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분은 교수대로 끌려가기 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선 삶의 시작입니다.” 신앙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았던, 그러면서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줬던 그분이 남긴 말은 ‘죽음이 곧 삶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가을까지 온 야산을 화려하게 물들였던 이름 없는 들꽃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고독한 겨울 품으로 사라진 듯 보이..

테텔레스타이(다 이루었다) - 정학진 목사<포천 일동감리교회>

십자가에 달린 주님께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 ‘가상칠언’ 중 여섯 번째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입니다. 이어 주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희랍어로 된 열 개의 단어인데, 이 짧은 말은 ‘테텔레스타이(tetelestai)’입니다. 당시 흔하게 쓰이던 말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한 후 남긴 말이었고, 상인이 모든 부채를 변재한 후 홀가분한 기분으로 던진 말도 이 말이었습니다.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모두 마친 후 자신을 보낸 주인에게 돌아와 하는 보고도 이 말이었고, 성전에 있는 제사장이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살펴본 후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도 바로 이 말입니다. 테텔레스타이! “흠 없이 완전하다” 혹은 “다 마쳤다”는 말입니다. 기실 우리 주님..

다 이루었다 - 한재욱 목사(서울 강남비전교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삶을 정리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 19:30). 3년간 진행된 예수님의 사역은 안타까울 정도로 짧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죄 용서를 받고 병을 고침 받으며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눈먼 사람,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테 텔레 스타이!(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고백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중요한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이루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하며 살 때 가장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이 땅에..

사순절의 영성, 연합 - 이인선 목사(서울 열림교회)

‘나이 먹다, 욕먹다, 잊어 먹다, 골(goal) 먹다, 사업 말아먹다, 감동 먹다’ 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는다’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런 비유에 대해 한국인들이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단일성, 통일성’의 감정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먹다’라는 표현도 유의미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최후의 만찬에서 주는 메시지는 ‘죄 사함’과 더불어 ‘한 몸의 결합, 함께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이것을 마시라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에서 ‘먹고 마심’은 입으로 먹고 목으로 삼키어 내 몸이 되는 것입니다. 밥 없이 살 수 없듯이 예수님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

범우주적인 업적 -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식당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셰익스피어에게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손님들의 관심은 온통 대문호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현관을 청소하던 한 청년이 힘없이 빗자루를 던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를 본 셰익스피어는 식사를 멈추고 청년을 불러 왜 빗자루를 던졌는지 물었습니다. 청년은 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위대한 작품을 쓰셔서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존경을 받고, 저는 고작 바닥이나 쓰는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제 자신이 한심할 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청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자네와 나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네. 나는 펜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의 한 부분을 표현하고 있지. 자네..

참 고난과 거짓 고난 - 강신욱 목사<남서울평촌교회>

요즘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은 게임을 합니다. 스마트폰이 없는 아이들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자기도 게임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다 자존심이 상한 아이는 부모에게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릅니다. 소신 있는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아이는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는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과연 성도의 고난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이로부터 벗어나길 바란다는 간구를 올릴 만한 것일까요? 아마 대부분은 위의 사례처럼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일 것입니다. 누구는 진학하고, 누구는 취직하는데 자신은 못해 속상합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가장 작지만 가장 큰 것으로 - 이일성 목사(군산 풍원교회)

중소 도시에서 살다 보면 아쉽고 그리운 것이 간혹 있습니다. 대도시의 문화적인 혜택이 그렇고, 농촌의 텃밭에서 나오는 푸성귀가 그렇습니다. 농촌은 텃밭을 만들어 푸성귀를 얻기가 쉽지만 중소 도시는 이것도 저것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보면 환경을 넘어서서 당당히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자투리땅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투리땅은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어디에든 있습니다. 담벼락 옆에도, 초등학교 울타리 너머에도, 차도 옆에도 어김없이 눈에 띕니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고 이랑을 만듭니다. 그러고는 때를 따라 각종 채소의 씨나 오이와 고추의 모종을 심고 고구마도 심습니다. 그 땅은 비록 작지만 수고한 만큼 거두는 즐거움을 줍니다. 각종 채소를 수확할 때가 되면 ..

대지를 뚫고 - 최용우(햇볕같은이야기)

대지를 뚫고봄이 되면 나도 모르게 땅바닥을 자주 들여다본다. 꿈틀꿈틀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푸른 새싹들이 반갑다. 지난겨울 어떻게 그 추위를 견디고 살아남았다가 저렇게 올라오는지 모르겠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씨앗에는 생명이 있기에 때가 되면 발아를 하는 것이고, 뿌리에도 생명이 있기에 때가 되면 땅을 뚫는 것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하여 인간들을 위협한다고 해도 인공지능에게는 자연지능에게 있는 그 ‘생명’이 없다. 알파고(AlphaGo)같은 인공지능(AI)의 ‘생명’은 전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뛰어나다 해도 손가락 하나로 전원 스위치를 off 해버리면 작동불능 상태가 된다. 신앙에도 ‘생명’이 있다. 생명이 없는 신앙은 ‘인공 지능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생명은 바로..

링반데룽 - 정학진 목사<포천 일동감리교회>

소설가 황순원의 작품 중에 ‘링반데룽’이란 단편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공수병으로 죽어가는 친구를 지켜보면서 멀어진 애인 ‘설희’와의 재회를 꿈꾸지만 제자리만 맴돌 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링반데룽을 안타까워하는 작품입니다. 링반데룽은 독일어인데 ‘링(Ring)’은 ‘원’을, ‘반데룽(Wanderung)’은 ‘방황’ 혹은 ‘방랑’을 의미합니다. ‘원형방황’으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등산용어인데 동일한 지점에서 일정한 장소를 원을 그리며 계속 방황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똑바로 나아간다고 믿고 걸었는데 한참 후 바라보니 원래 출발한 그 자리에 서 있더란 말입니다. 등산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링반데룽, 즉 원형방황 혹은 환상방황(環狀彷徨)입니다. 계속 한자리를 맴돌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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