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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기도하며/겨자씨 1564

사순절의 영성, 갈등에서 섬김으로 - 이인선 목사(서울 열림교회)

우리 집 다섯 식구가 외식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동네를 벗어날 즈음이면 메뉴가 결정되지만 한 두 명은 본인 뜻이 반영되지 않은 것 때문에 살짝 토라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이 사는 공동체 안에는 늘 갈등이 존재합니다. 가족의 작은 이견에서부터 내면의 서로 다른 생각이나 정치적 신념에 이르기까지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은 다양합니다. 그래서 삶은 갈등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갈등의 뿌리에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라는 ‘권력의 충동’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누가 앉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로 다툼이 생겼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 채 세속적 권력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한 야고보와 요한뿐 아니라 ..

당신은 어떤 모습입니까? -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중국의 고전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중산군이라는 왕이 사대부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습니다. 잔치에는 사마자기라는 사람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여러 음식이 오간 후에 양고기국을 먹을 차례가 됐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부족했고, 사마자기에게는 몫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사마자기는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중산군을 버리고 이웃 초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초나라 왕으로 하여금 중산군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중산군은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장정 두 사람이 창을 들고 뒤따르며 중산군을 지켜주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중산군은 그들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 부친이 배가 고파 쓰러져 있을 때 왕께서 친히 찬밥 한 덩이를 ..

겨자씨와 시간 - 강신욱 목사(남서울평촌교회)

어린 시절 읽으려고 펼친 신문이 이미 너덜너덜해진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친 선친께서 조간신문을 먼저 읽고 가위로 기사를 잘라 스크랩하신 것입니다. 초등학생이 방학숙제라도 하듯 정성스럽게 신문을 오리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제 눈에 선합니다. 선친의 손때 묻은 책을 뒤적이다 누렇게 바랜 신문 조각이 곱게 끼워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바로 국민일보 ‘겨자씨’였습니다. 선친에게 ‘겨자씨’는 짧지만 긴 생각의 여운을 남기고 신앙적 도전을 던져주는 귀한 글이었습니다. 과연 제가 그런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염려가 듭니다. 이어 천국에 계신 선친께서 기뻐하시리란 생각에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이런 글을 쓰는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세월의 빠름을 실감했습니다. 시간은 참 묘합니다. 실체가 없습니..

보이지 않는 힘 - 정영교 목사(산본양문교회)

미국에 있는 ‘무브 온(Move On)’이라는 단체를 아십니까. 일반 시민들의 네티즌 정치단체입니다. 1998년 9월 ‘MoveOn.org’라는 이메일 단체로 출범해 당시 성 추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처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구명운동을 펼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통령의 탄핵을 모면케 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정부는 물론 기업, 종교도 대중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크게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을 모르는 둔한 정치인들, 기업인들, 종교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는 긍정적인 이미지와 사회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긍정적인 이미지와 사회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에 있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지속성과 진정성입니다..

믿음으로 이루는 복원력 -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배가 큰 파도에 넘어질 듯하다가 다시 세워져 앞을 향해 가는 것을 ‘복원력’이라 합니다.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고,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는 게 복원력입니다. 인생에선 수많은 복원력이 필요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삶이란 우리의 바람대로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선 우리를 가장 낮은 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처참한 상태 같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엎어져 보지 않았던 사람은 땅 바닥에 쓰인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자빠져 벌렁 누워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쓰인 글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슴과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해 위기, 아픔, 고통의 순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

믿음으로 이루는 복원력 - 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배가 큰 파도에 넘어질 듯하다가 다시 세워져 앞을 향해 가는 것을 ‘복원력’이라 합니다.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고,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는 게 복원력입니다. 인생에선 수많은 복원력이 필요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삶이란 우리의 바람대로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선 우리를 가장 낮은 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처참한 상태 같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엎어져 보지 않았던 사람은 땅 바닥에 쓰인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자빠져 벌렁 누워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쓰인 글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슴과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해 위기, 아픔, 고통의 순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 한재욱 목사(서울 강남비전교회)

미국 고든 맥도날드 목사의 책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인 성장’에는 두 종류의 삶이 나옵니다. 충동에 이끌린 삶과 소명의 삶입니다. 충동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합니다. 세상 가치관을 좇으며 그저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삶’입니다. 반면 소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목적과 비전을 깨닫고 그 비전을 좇아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계획과 생각대로’ 삽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심한 박해 속에 살았습니다. 살아갈 터전이 없어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했기에 성령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힘이 그들을 끌고 가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

순절의 영성, 씨름하는 믿음 - 이인선 목사(서울 열림교회)

얼마 전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한 어머니와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딸의 떠남이 자신의 죄인 것처럼 자책했습니다.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려도 자신의 삶과 딸의 인생을 돌아보며 갑작스러운 고통의 원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현대인은 고통의 문제를 인과관계로 이해하곤 합니다. 병이 든 것은 과로나 바이러스 때문이고, 사고가 나는 것은 누군가의 부주의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심각한 어려움을 만나거나 뜻밖의 재앙을 당할 때 인과관계를 넘어 자신의 죄를 묻는 차원까지 들어갑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과 더불어 고통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아닙니다. 고통은 사람을 파괴하..

허물 -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조선시대 황희 정승이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황희는 들판을 거닐다가 늙은 농부와 두 마리의 소가 일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 농부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노인장, 누런 소와 검정 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일을 잘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깜짝 놀라 황희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아니 왜 그러시오?” 황희가 의아해하며 묻자 농부는 “쉿, 목소리를 낮추시오”라며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황희는 농부의 행동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아 또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소곤대는 것이오?” 그러자 농부가 다시 속삭이듯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소들은 다 일을 잘하지만 누런 소가 묵묵하게 제 할 일을 잘하는 편이지요.” 황희는 황당했습..

화해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김성태 목사(삼척 큰빛교회)

돈 리처드슨 선교사님의 책 ‘Peace Child(화해의 아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리처드슨은 인도네시아 ‘이라얀자야’ 정글에서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였습니다. 식인종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를 고민해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선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사위 부족’이 이웃 부족과 전쟁을 하게 됐습니다. 사위 부족이 패할 것이 확실해지자 사위 부족 추장은 자신의 아들을 이웃 부족에게 보냈습니다. 아들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자 비로소 전쟁은 끝이 났다고 합니다. 추장의 아들이 ‘화해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선교사님은 사위 부족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들려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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