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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기도하며/겨자씨 1564

그 길을 걷는 사람들 - 겨자씨

크리스천은 누구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예수의 길을, 사명의 길을 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 길을 걷는 사람들’로 불렸다고 하지요. 시인 윤동주는 ‘눈감고 간다’는 작품에서 사명의 길을 걷는 자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 밤이 어두웠는데 / 눈감고 가거라 // 가진 바 씨앗을 / 뿌리면서 가거라 //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1연은 사명자의 궁극적 관심을 보여줍니다. 하늘을 바라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2연은 사명자의 저돌적 다짐을 보여줍니다. 밤의 시련에도 흔들림 없이 어둠 너머의 빛을 생각하며 질끈 눈감고 가는 것입니다. 3연은 사명자의 일상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백범의 결초보은 - 겨자씨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조국 광복과 국토방위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전몰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정한 기념일입니다. 1896년 청년 김창수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했습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고종의 특사로 사형을 면한 후 탈옥해 전남 지방을 두루 다니며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보성군 쇠실마을에서 40여일을 은신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김구 선생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쇠실마을을 다시 찾았습니다. 48년이 지나도록 은혜를 잊지 않은 선생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2006년 쇠실마을에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옛말에 은혜는 흐르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

애국하는 성도 - 겨자씨

송상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문관입니다. 부산 동래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다가 전사했습니다. 1592년 4월 14일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 만에 동래성에 도달했습니다. 양산군수 조영규와 울산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도착했습니다.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고니시는 동래성에 도착해 전투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송상현에게 보냈습니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빌려 달라.” 즉 지나갈 테니 길을 좀 열어달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들의 침략으로 수많은 수군과 부산진성의 장병이 전사했는데 어찌 그들에게 길을 비켜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송상현은 다음과 ..

법보다 훌륭한 것은 사랑입니다 - 겨자씨

동양의 고전인 노자의 도덕경 17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 기차친이예지(其次親而譽之), 기차외지(其次畏之), 기차모지(其次侮之).” 이 문장에 대해 사람들은 이런 해석을 합니다. 노자가 말하는 다스림에는 4가지가 있는데 가장 하급의 다스림은 포학으로 군주가 자신의 마음대로 권력을 사용해 독재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위의 다스림은 법치로 군주가 법대로 다스리는 것인데 백성들은 군주를 두려워합니다. 그보다 나은 다스림은 덕치로 덕을 베풀며 다스리기에 백성들은 그를 칭찬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가장 뛰어난 다스림은 무치입니다. 누가 어떻게 통치하는지 백성들은 알지 못하나 모든 것이 순리대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정치를 말합니다. ..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 - 겨자씨

낯선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서 누군가 나를 안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면 마음이 안심될 것입니다. 인생의 여행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고 살아가는 광야 같은 여정이 인생길입니다. 나의 길을 인도하고 나의 필요를 미리 알고 공급해 주는 분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순종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미리 준비하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들을 바치려 한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순종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순종의 가장 큰 걸림돌은 내 마음에 있는 우상입니다. 만일 ..

성숙 - 겨자씨

“성숙이란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헨리 나우웬 저 ‘예수의 이름으로’(두란노, 8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삶은 리얼합니다. 동화책같이 권선징악이 뚜렷하지도 않고, 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론 주님이 나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 가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 떨어지지 않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이끌려 다닐 수 있는 인내가 성숙입니다. 베이킹파우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밀가루도 싫어합니다. 소금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합쳐서 구웠더니 맛난 비스킷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하나 보면 거친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합치면 비스킷이 됩니다. 낱개로 보면 쓰디쓴 ..

거듭남의 의미 - 겨자씨

미국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공식 석상에서 이런 발언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나는 거듭난 크리스천입니다.” 그 믿음에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사실 이 말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거듭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사건으로, 중생 또는 신생이라 부릅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거듭났다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입니다. 은혜로 죄 사함 받은 것입니다. 의롭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주 하나님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 형상이 회복된 것입니다. 성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

질투는 나를 파괴한다 - 겨자씨

영화 ‘아마데우스’는 궁중음악가 살리에리와 천재적 음악가 모차르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궁중음악가로 인정받던 살리에리에게 모차르트의 등장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보며 자신의 음악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질투로 발전합니다. 그는 모차르트를 향해 증오를 키우며 음악적 재능을 모차르트에게만 주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부러움은 시기로, 시기는 증오로, 증오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비뚤어진 시기심은 결국 모차르트를 죽이려는 계획으로 드러납니다. 살리에리는 부친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모차르트가 환영에 시달리도록 교묘하게 조장했습니다. 그는 모차르트가 짧은..

혼자 있는 시간에 - 겨자씨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마시기), 혼영(혼자 영화 보기)….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시선 처리입니다. 혼밥할 때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주변 시선을 의식해 스마트폰을 봅니다. 어느새 스마트폰은 외로움을 달래주는 강력한 도구가 됐습니다. 혼자 있을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지켜보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큼 신실하고 정직한지 알게 됩니다. 혼자 있을 때 사탄의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다윗왕이 그랬습니다. 그는 홀로 한적한 시간에 은밀히 간음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는 영적인 깊이를 더해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낯선 곳에서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고 무..

내가 없어지는 순간 - 겨자씨

‘내’가 사라지고 펼쳐진 풍광에 활짝 열리는 여행의 황홀함! 그러나 여행하면서도 심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사람은 창밖 풍경을 보지 못하고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보곤 합니다. 내가 없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위대한 무용수 니진스키는 “당신의 삶에서 가장 훌륭한 순간은 언제입니까”란 질문에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오직 춤만 남는 순간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눅 9:33상)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는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외칩니다. 흔히 베드로의 이 고백을 가리켜 그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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