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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기도하며/겨자씨 1564

더 큰 빛, 더 큰 기운 - 최종천 목사 <분당중앙교회>

어둠에 있을 때 작은 촛불 하나를 켜면 사람들이 그 빛 아래로 모입니다. 얼굴을 식별하고 책을 읽고 바느질을 합니다. 그 빛 아래 모여 그림자 드리우는 여운 속에서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촛불이 켜진 상태에서 전등불을 켜면 모든 게 훤히 드러납니다. 그 어떤 구석, 어떤 사물도 어둠 없는 밝은 공간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을 밝혀줬던 촛불을 아무 미련 없이 ‘후욱’ 하고 입김 불어 끕니다. 더 큰 빛, 더 큰 기운 아래 이제까지 어둠을 밝혀왔던 작은 빛과 기운은 힘없이 그 소임을 다하고 사그라집니다. 그 공간에 창문 넘어 환하게 아침 햇빛이 비춰옵니다. 그 빛은 온 세상을 덮습니다. 너무 눈부셔 그 빛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반짝임이 됩니다. 아침 빛은 자신을 넘어 사물에게까지 ..

얼씨구 절씨구 인생이라도 -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우리 조상들이 많이 부른 이 노래의 본래 말은 ‘얼씨구 절씨구 지하자졸씨구(蘖氏求 卍氏求 至下者卒氏求)’입니다. 여기서 얼씨는 세상에서 멸시 당하는 서자의 씨를, 절씨는 승려의 씨를 뜻합니다. 지하자졸씨는 밑바닥 인생에서 살다가 전쟁터에 나가 궂은일을 해야 했던 졸때기의 씨를 말합니다. 결국 이 노래는 ‘서자와 중, 졸때기의 씨라도 받아야겠네’라는 뜻입니다. 슬픔을 극복하려고 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가장 큰 슬픔이 바로 자신이 얼씨, 절씨, 지하자졸씨 출신이라는 사실에 좌절하며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큰 아픔 가운데 있어도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장..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의 유익 - 이인선 목사(열림교회)

현대 첼로 연주의 아버지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였던 파블로 카잘스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첼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영국 BBC에서 그에 관한 특집방송을 제작하면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는 평소에 궁금하던 것을 질문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이십니다. 그런데 95세 된 지금까지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왜 힘들게 계속해서 연습을 하십니까?” 카잘스는 “지금도 연습을 통해서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90세가 넘어서도 매일 6시간씩 연습하며 기본기를 다지는 데 비결이 있었습니다. ‘기본기 없는 고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기초와 기본의 중요성은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신앙생활을..

한 해만 더 희망을 가졌더라면 -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Man’s Search for Meaning(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빅터 에밀리 프랭클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다하우 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44년 크리스마스 전후와 1945년 신년 연휴 전후에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유대인들이 갑자기 많이 죽었답니다. 전염병이 돌거나 가스실에 끌려갔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이런 마음들을 갖고 있었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도 석방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자 마음에 병이 들어 버렸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강제 수용소에서 지내는구나’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 김성태 목사(삼척 큰빛교회)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 어리석은 말입니다.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이유와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산 사람입니다. 결국 불가능한 상황을 맞아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와 ‘불가능은 없다’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폴레옹는 ‘내 사전에’라고 말했지만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말했습니다. 능력을 주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바울의 말로 재해석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그분의 능력으로 내가 모든 것을..

위기에서 빛나는 신명과 열정 - 정영교 목사(산본양문교회)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은 연설 중에 “위기는 기회와 함께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잘 되기 위해서는 비전과 문화 그리고 실력,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게 문화입니다. 문화란 신명과 열정입니다. 아무리 비전과 실력이 있어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대한 예술과 문학, 건축물 뒤에는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작곡가가 만들어 내는 감동적인 음악, 육상 선수가 이전 기록을 깨고 세우는 신기록은 그들의 열정을 원동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그분의 열정으로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안에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땅으로 온 위기의 여인..

정서적 설득과 반복 훈련 - 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우리가 감동 받았다고 할 때를 들여다보면 정서적 설득을 당한 경우가 많습니다. 들으니 그럴 듯하고 보고나니 정말 분명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북받치고 목이 메어오기도 합니다.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인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믿습니다”하고 달려 나가지만 의외로 삶에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현실은 감감하기만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외치기는 했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또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봅니다. 정서적 설득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기는 했지만 그 감정만으로는 현실의 변화를 이루기에 역부족입니다. 삶에서는 정서뿐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의 변화까지 수반돼야 합니다. 이 정서적 설득과 현실의 변화 사이의 공간을 연결..

인간의 양면성 - 이인선 목사(열림교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이런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의 모델을 찾기 위해 성전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성전 한 구석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청년이 있어서 살펴보니 예수님과 흡사해 보였습니다. 평화로운 모습과 자비로운 인상, 눈에서는 빛이 났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모델로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가던 중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다가 이번엔 술집에서 만취한 청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흐르고, 표정에는 욕심이 넘쳐 보였습니다. 그를 가룟 유다의 모델로 그려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가까이 가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의 모델이었던 그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의 예수님..

기본적인 것을 회복하자 -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된 뒤 선수들을 연구·분석한 결과 결정적인 문제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축구선수에게 가장 기본인 체력이 부실했던 것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선수들에게 공을 놀리는 기교를 가르치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히딩크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기초훈련이 밑거름 돼 한국축구는 월드컵 4강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성과를 이루게 됩니다. 지난 수년 동안 한국교회는 침체기에 있었습니다. 교회의 부흥이 멈추고 성도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비상이 걸린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을 위해 온갖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이 한국교회에 소개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이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입니까. 가..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 김성태 목사(삼척 큰빛교회)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그 벽 사이사이에 하얀 종이쪽지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 찾아간 많은 방문객이 자신의 기도소원을 꽂아두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이제는 아예 근처에 팩스를 가져다 놓고 팩스 번호를 전 세계에 선전합니다. 팩스로 기도문을 보내면 직접 가지 않아도 통곡의 벽에 기도문을 꽂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팩스로 자신의 기도문을 보내는데, 팩스를 보내는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사모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신적인 믿음이 많이 존재합니다. ‘예수 믿으면 잘 산다, 건강하다,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병들 수 있고 가난해지기도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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