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로병사 - 사랑밭새벽편지생로병사 - 사랑밭새벽편지

Posted at 2016.08.08 08:03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생로병사

보기만 해도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주름과 한숨과 늙음ㅡ

삶의 터널을 지나며 녹아진 아픔들
삶을 진하게 증거로 가슴에 전해진다

젊음이 좋다고들 부러움 사지만
실수와 편견에 울며 몸부림치는 사이
바람처럼 세월은 스쳐 지나가고

다가오는 건 지니고 살아온 육신의 아픔만이
뼈로 살로 전해져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파 몸서리치고 고통에 혼절하다가
결국 정신을 잃고 그만 치매를 만난다

주위 수많은 사람들의 근심을 안기며
이제 육신은 버려야 할 장소를 찾는다

사람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처리해야 할 대상자가 되는 것

사라져가고 소멸되어감에
서럽다 울지 마라

오히려 장엄하게 사라져라
차라리 저 세상 맞을 준비 설레어라

더 나은 영원 세상을 위하여
한 줌 재 남을 때까지...

- 소 천 -

- 삶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며 기쁨입니다 -


Free Note - 삶이라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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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사랑밭새벽편지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사랑밭새벽편지

Posted at 2016.07.19 10:31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 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 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

사람은 떨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공은 떨어지면 ‘곧 튈 준비되어 있는 꼴’로
다시 튀어 오릅니다

- 언제나 고무공처럼 튈 준비가 설레게 합니다 -


양현주 - 푸른 하늘을 날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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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내 김밥~! - 사랑밭새벽편지어~ 내 김밥~! - 사랑밭새벽편지

Posted at 2016.07.01 09:51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하는 글 그러면서 코끝이 찡해지는 글이네요!~ 오늘도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존재, 아름다운 의미가 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어~ 내 김밥~!

(6월 21일 저녁에 있었던 실제 상황입니다)

퇴근 후 나는 연극 연습을 하러 간다
신도림 환승역에서 걷는 중이었다
엄마가 호일에 싸준 샌드위치를 꺼내 먹는다

한 입을 먹고는 사람이 너무 많아
호일을 다시 덮고 차를 막 타려 하는데 ...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 중 마주오던 한 사람!
보기에 허름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잽싸게 내게 손을 뻗고서는
"어~ 내 김밥" 하며 뺏어 가는 게 아닌가?

움찔 할 겨를도 없이 내 샌드위치를 덥석 잡았다
순식간에 빼앗기고 말았다
정말 누가 보면 자기 꺼 가져 간 줄
착각할 정도로 태연하게 먹으며 돌아간다
노숙자였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얼떨떨하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났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노숙자 한명에게
한 끼를 챙겨줬다 '나 참 기가 막혀!'

이럴 때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는 생전 처음 지하철 안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착한 일 한 번했다

기분이 좋지도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 선한가게 / 소 현 -

참 별 일도 다 있다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별 일이 많이 있습니다
노숙자는 좋겠다요! ㅎ 네 꺼도 내 꺼 이고...

- 생활 한 편의 모습! 웃으며 맛있는 하루 보내시길 -


Love Paper - 아낌없이 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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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은 남자 - 사랑밭새벽편지머리 좋은 남자 - 사랑밭새벽편지

Posted at 2016.06.25 15:20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머리 좋은 남자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말하자 여자가 말했다

“저는 용기도 있고 머리도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요”
“아! 그럼 문제없어요
지난번 호수에서 보트가 뒤집혔을 때
제가 당신을 구했잖아요?
그걸로 제가 용기가 있다는 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나요?”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그건 됐어요
하지만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조건이 남았어요”

그러자 남자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건 염려하지 마세요!
그 보트를 뒤집은 게 바로 접니다”

“^^”

- 인생유머 / 강서영 정리 -

한 주간 웃을 일이 많이 없었지요?
이 글을 보시고 좀 리얼하게
친구와 많이 웃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 웃음은 만병의 치료제다 -


Little Friend - 작은 여유가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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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메례 이야기 - 조선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의 양녀여메례 이야기 - 조선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의 양녀

Posted at 2016.01.28 10:45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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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장배경,보구여관에 근무

여메레는 1872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남편의 성을 따 황메례 혹은 양메례로도 불렀다. 메례는 그가 1889년 세례를 받을 때 선교사에게 받은 이름 "메리"의 한자명이다.

그는 마산에서 여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가정환경을 밝힐 자세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어려서 그를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톤(M.F.Scranton)부인의 양딸로 보내졌다. 스크랜톤 부인은 그를 자기가 설립한 이화학당에 입학시켜 신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가 이화학당에서 수학한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스크랜톤 부인은 그를 "이화학당 초기 학생의 한 사람" 으로 기록하고 있어 1886-99년 사이에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크랜톤 부인의 집에 기거하며 공부하면서 상동교회에 출석하였고 정동에 있는 여성병원 보구여관에 홀 부인의 조수로 근무하였다. 여메례는 특히 영어회화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899년 전후로 해서 그는 황씨성을 가진 사람과 결혼했다. 이때부터 그는 여메례에서 황메례로 성을 바꾸었다. 그러나 결혼한지 3개월만에 그의 남편은 혼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미국 유학길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사망하여 그는 과부가 되었다. 신혼 3개월 만에 과부가 된 황메례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보구여관의 전도부인으로 선교사업에 몰두하였며 뛰어난 영어회화 실력으로 광무황제 앞에 들어가 어전통역을 하기도 했다.

출처 : http://kcm.co.kr/person/person_k0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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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130주년 특집] 선교토크 여성, 사랑, 복음 (MC. 진재혁 목사, 개그우먼 이성미 집사)[내한선교사 130주년 특집] 선교토크 여성, 사랑, 복음 (MC. 진재혁 목사, 개그우먼 이성미 집사)

Posted at 2015.12.12 21:22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다큐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 https://youtu.be/gcIOOAHckSc
CGNTV 공식 홈페이지 : http://www.cgn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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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의 양녀, 여메례 이야기 - CGNTV 내가 사랑한 조선조선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의 양녀, 여메례 이야기 - CGNTV 내가 사랑한 조선

Posted at 2015.12.12 21:17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여메래 개화기 여성교육가, 성결교 여전도사


1.성장배경,보구여관에 근무

여메레는 1872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남편의 성을 따 황메례 혹은 양메례로도 불렀다. 메례는 그가 1889년 세례를 받을 때 선교사에게 받은 이름 "메리"의 한자명이다.

그는 마산에서 여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가정환경을 밝힐 자세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어려서 그를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톤(M.F.Scranton)부인의 양딸로 보내졌다. 스크랜톤 부인은 그를 자기가 설립한 이화학당에 입학시켜 신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가 이화학당에서 수학한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스크랜톤 부인은 그를 "이화학당 초기 학생의 한 사람" 으로 기록하고 있어 1886-99년 사이에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크랜톤 부인의 집에 기거하며 공부하면서 상동교회에 출석하였고 정동에 있는 여성병원 보구여관에 홀 부인의 조수로 근무하였다. 여메례는 특히 영어회화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899년 전후로 해서 그는 황씨성을 가진 사람과 결혼했다. 이때부터 그는 여메례에서 황메례로 성을 바꾸었다. 그러나 결혼한지 3개월만에 그의 남편은 혼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미국 유학길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사망하여 그는 과부가 되었다. 신혼 3개월 만에 과부가 된 황메례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보구여관의 전도부인으로 선교사업에 몰두하였며 뛰어난 영어회화 실력으로 광무황제 앞에 들어가 어전통역을 하기도 했다.

2. 여성운동을 시작

그는 1901년 정동교회 여성신도 63명을 규합하여 보호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한국교회 첫 여성 조직체로서 오늘의 여선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또 1903년에는 모교인 이화학당에 학생 자치단체인 "러빙 소사이어티"(Loving Society) 를 창설하여 지도하였으며 하란사와 함께 스크랜톤의 교육사업을 적극 후원하였다.

1903년 그는 일본의 교육기관을 시찰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현대신 여성교육기관의 활발한 활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고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도 근대교육기반의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1904년 스크랜톤 부인이 담당하고 있는 상동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엡워드여자청년회를 조직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또 수원에 있는 삼일여자학교에까지 가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3. 진명여학교 설립

일본 사찰후 양장으로 의복을 바꾼 그는 단순한 개화여성이 아니라 선구적인 여성교육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가 가르치던 학생중에 고종황제의 후비인 엄비의 사촌동생 엄준원의 딸이 있었다. 그래서 엄준원은 그를 엄버에게 소개하여 그의 여학교 설립의 꿈을 진언하게 되었다.

어전 통역으로 이미 궁내부에서 신임을 얻었던 그는 마침내 학교설립 허가를 받고 1906년 창성궁 건물을 교사로 하사받고 진명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 개교한 이 학교 교장엔 엄준원이 취임하였으나 학교운영의 실질적인 업무는 학감으로 취임한 황메례가 맡아 처리했다.


다큐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 https://youtu.be/gcIOOAHckSc
CGNTV 공식 홈페이지 : http://www.cgn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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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다큐]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 (내레이션: 최수종, 명세빈) @ 내한선교사 1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추천 다큐]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 (내레이션: 최수종, 명세빈) @ 내한선교사 1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Posted at 2015.11.10 11:46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내레이션: 최수종, 명세빈 

자신의 이름조차 갖지 못 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만을 전했던 여선교사들의 이야기 

그들이 있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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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신문·CGNTV 공동기획

 

조선에 온 선교사 70%가 여성이었다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로제타 홀, 여메례, 박에스더 삶 조명

CGNTV 11월 1일 다큐멘터리 방영 … “몰라도, 잊어서도 안 된다”



최초의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1885년 6월 20일 마침내 그들이 인천에 도착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52세였다. 메리 스크랜튼은 한국에 온 최초의 여성 선교사다. 그녀는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고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외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여성들과 아이들이 그녀를 피했다. 1886년 5월 31일 드디어 기다리던 첫 학생이 입학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번째 입학생이 왔다. 학교에 가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라고 보낸 것이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찾아와 스크랜튼 선교사에게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고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약속을 받은 후에 돌아갔다.

세 번째 입학생은 콜레라에 걸린 여성의 딸이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1886년 정동에서 병원을 만든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의 첫 번째 환자가 되었다. 1887년 명성황후는 이 학교의 이름을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고 지어줬다. 이 학교가 지금의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의 전신이다.

메리 스크랜튼은 여성 전문 의료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여성들이 남성 의사를 만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 병원의 공간을 빌려 여성들을 진료했다. 1888년 11월 이화학당의 한 한옥을 개조해 여성 전문병원을 만들었다. 고종은 이 병원의 이름을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고 지어줬다.

메리 스크랜튼은 여성들을 위한 주일학교도 만들었다.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을 보장해 주려는 그녀의 노력 덕분에 많은 여성들이 모였다. 1889년 한해 주일 저녁집회에 참석한 여성이 무려 1,064명이나 되었다. 1889년 2월에는 최초의 여성교회도 설립했다. 이 교회는 당시 조선에서는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메리 스크랜튼은 이화학당이 자리를 잡자 로드 와일러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1891년 안식년을 얻어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다. 189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도부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그녀는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튼과 상동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그녀가 가르친 전도부인은 모두 9명이었다.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1년간 4,000가정을 방문했고, 복음을 전한 여성이 2만 명이 넘었다. 그녀는 노년까지 한국에서 여성들의 교육과 선교에 헌신했다. 1909년 10월 8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상동 자택에서 소천했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여메례 전도사’

 

메리 스크랜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국 여성이 있다. 그녀는 고종 황제 곁에서 영어 통역을 맡았던 여메레(1872~1933) 전도사다. 여메레 전도사는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없었다. 마산의 여 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 키우면 일찍 죽는다’는 점괘에 겁을 먹은 부모가 메리 스크랜튼의 집 앞에 버리고 갔다. 여메레는 당시 10대 중반이었지만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못했다. 메리 스크랜튼은 그녀를 양녀로 받아들이고 이화학당에 입학시켰다. 세례를 주면서 자신의 이름 메리(Mary)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부르기 쉽게 ‘메례’라고 불렸다.

여메레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 3개월 만에 남편이 죽었다. 여메레 전도사는 정동교회에 출석하며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극복했다.

여메레는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봉건 사회를 타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1897년 8월 정동교회는 남성 지회 ‘월은회’, 여성 지회 ‘조이스회’를 조직했다. 여메례는 조이스회 부회장이 되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 해 말, 정동교회 봉헌 기념으로 청년회에서 공개 토론회를 가졌다. 주제는 ‘여성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맞나?’였다. 당시 여성 회원들은 방청석에 앉아 있어야 했고, 남성들이 나서서 찬반 토론을 했다. 그때 찬성편에 서재필과 조한규가 반대편에 윤치호와 김연규가 있었다. 당시 윤치호는 여성 교육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성경에 보면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인류 타락의 근원이 되었다. 여성에게 지식이 들어가면 좋을 것이 없다.”

성경을 근거로 여성 교육 불가론을 피는 윤치호의 연설에 찬성편의 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윤치호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그 순간 방청석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하와가 죄를 지었으나 마리아가 아니었으면 예수가 어찌 세상에 오셔서 죄를 구원하였으리요. 성경에서 하와만 보지 말고 마리아도 보시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메례였다. 그녀의 발언에 많은 여성들이 박수로 응답했다.

여메례는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다. 생활이 어려운 과부나 부인들을 도와주는 단체 ‘보호여회’를 만들기도 했다. 보호여회가 감리교회 여선교회로 발전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30여 명이 모였는데 현재는 1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회가 크게 흥하여 여러 만 명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여메례의 창립기도가 이뤄진 것이다.

 

조선에 특수교육 도입 ‘로제타 셔우드 홀’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선교사는 뉴욕 설리번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885년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캐너드 챈들러 여사와 토번 여사의 말이 계기가 되었다. 그녀들은 인도에 의료 선교사가 부족한 상황을 설명했는데, 로제타 홀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빈민가 병원에서 근무하게 됐다. 이곳에서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을 만났다.

메리 스크랜튼이 만든 ‘보구여관’은 여성 전문병원으로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몰려왔다. 하워드 박사는 환자들을 돌보다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는 하워드 박사 대신 로제타 홀을 한국으로 파송했다. 그렇게 로제타 홀은 1890년 10월 제물포 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특수교육은 로제타 홀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이 평양에서 전도를 한 교인의 딸 ‘봉래’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로제타 홀이 소녀에게 점자를 알려준 것이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초다. 로제타 홀은 어릴 적 배웠던 점자를 직접 기름종이에 점을 찍어 가며 가르쳤다. 점자 교육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해 서울로 철수 해야만 했다. 설상가상 남편이 병사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 점자 교육을 다시 받고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했다. 1897년 그녀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녀는 보구여관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료를 만들었다. 1898년 평양으로 돌아간 그녀는 다시 봉래를 만나 새로운 교재로 교육을 시작했다. 봉래는 다른 시각장애인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교사로 성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각장애인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한국 최초로 평양학교에 시각장애인반을 개설했다. 청각 장애인과 언어 장애인을 위해 ‘게암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활동

 

수많은 여성 환자들에 비해 여의사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의사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장로교와 의료 선교사업의 통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의학 훈련반을 개설해 4명의 한국 소녀와 1명의 일본 소녀를 가르치기도 했다.

로제타 홀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의료활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여의사 교육을 시작했다. 한국 여성들이 공부해서 조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당시 사회는 여성의 직업참여를 꺼려했고, 여성들도 피를 보는 일을 기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과 설득으로 여러 명의 여성들이 외국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들이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여의사로 활동하게 됐다.

로제타 홀은 여성의과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다. 한국 의료사역이 자립하지 못하는 이유가 외국인 의사들에게 사역이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1928년 9월 교육을 시작했다. 여자 의학강습소에서 18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로제타 홀의 이러한 노력 끝에 1934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5명이 의사 자격증을 받았는데 그들은 한국 최초의 여자 의학 교육기관에서 탄생한 의사들이었다.

로제타 홀은 1933년 한국에서 4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아들은 한국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셔우드 홀 박사다. 그는 ‘크리스마스 씰’을 만든 장본인이다.

최초의 여성 의학박사 ‘박에스더’

 

로제타 홀이 ‘보구여관’에서 의학 훈련반을 개설하고 소녀들을 가르쳤다. 그 중 한명이 김점동(박에스더, 1879~1910)이었다. 김점동은 의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영어 실력이 좋아 병원에서 통역을 하려고 데려온 소녀였다. 어느 날 로제타 홀이 구순구개열 환자를 수술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 길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김점동은 로제타 홀의 남편인 윌리엄 홀의 일을 돕던 성실한 청년 박유산을 소개받아 결혼했다. 로제타 홀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나게 되었다. 김점동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미국으로 함께 떠났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남편의 성인 박과 세례명인 에스더로 이름을 바꾸고 의사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 박유산은 로제타 홀의 친정 농장에서 일하며 그녀를 뒷바라지했다.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박에스더가 1900년 6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학위를 받기 20일 전 남편 박유산이 고된 노동 끝에 걸린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박에스더는 남편의 희생으로 얻은 학위로 부귀영화를 좇지 않았다. 안정된 미국의 의사 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통역을 했던 보구여관의 의사가 되었다. 병에 걸려도 남성 의사에게 보일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을 도왔다. 열 달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그 후 로제타 홀이 세운 평양의 ‘기홀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쉬지 않고 진료했다.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료로 진료 활동을 펼쳤다. 간호사 양성소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10여 년을 보낸 뒤 박에스더는 남편을 쓰러뜨린 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잊지 말아야 할 그 이름들

 

이외에도 잊지 말아야할 여성 선교사들은 한둘이 아니다. 1910년 여성을 위한 국내 유일의 대학과정 이화학당 대학과를 개설한 룰루 E, 프라이(Lulu Edna Frey) 선교사. 교과서 번역, 문서선교, 찬양집 편찬을 한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 선교사. 수피아 학교와 애양원을 섬겼던 ‘광주의 어머니’ 플로렌스 루트(Florence E. Root) 선교사 등 우리가 몰랐고 잊고 있었던 수많은 여성 선교사들이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줘야 할 때다. 그녀들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에 선교의 뿌리가 내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CGNTV가 내한선교사 130주년, 개국 10주년을 맞아 여성 선교사들을 조명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선교토크 ‘여성·사랑·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진재혁 목사(지구촌교회)와 방송인 이성미가 진행을 맡았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이경숙 교수(이화여대), 박정희 작가(미국 뉴욕주립대) 등이 패널로 출연한다. 선교토크 ‘여성·사랑·복음’에서는 여성 선교사의 역할,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다큐멘터리 ‘여선교사, 조선을 비추다’도 제작했다. 2명의 미국인 여성 선교사와 2명의 조선 의 여성리더를 조명했다. 미국, 일본, 한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아냈다. 로제타 홀 선교사의 일기장과 숨겨진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방영

‘여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11월 1일(일) 오전 10시 30분

선교토크 ‘여성·사랑·복음’ 11월 1일(일) 오후 8시 30분

출처 : 온누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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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모집] 선교 토크 '여성ᆞ사랑ᆞ복음' (MC. 진재혁 목사, 이성미 집사)[방청모집] 선교 토크 '여성ᆞ사랑ᆞ복음' (MC. 진재혁 목사, 이성미 집사)

Posted at 2015.09.23 12:19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방청신청: http://onoffmix.com/event/54278
시간: 2015.9.30 (수) 오후 3시 
장소: 서빙고 온누리교회 신관 5층 경찬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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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베델 - 내가 사랑한 조선(CGNTV QT)어니스트 베델 - 내가 사랑한 조선(CGNTV QT)

Posted at 2015.08.15 13:46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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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 : 1872 ~ 1909)

 베델 선생은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완구점을 경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5세 때 일본에 건너와서 완구점을 경영하였습니다. 10여년 고생 끝에 약간의 자본을 마련하여 모직물업에 투자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데일리메일 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와 그해 7월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습니다. 그가 발행인으로 내세워진 것은 당시 일본인 검열관의 사전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신문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와 《런던 트리뷴》지에 게재하는 등 나라 안팎에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는 항일언론 활동을 벌이며 배일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제는 그를 추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주일 영국공사에게 그의 추방에 협력을 요청하는 한편, 통감부는 반일적인 신문기사를 구실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지만 추방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통감부는 1908년 5월 27일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논설이 일본인 배척을 선동한 이유로 영국상해고등법원에 선생을 다시 제소하였고, 6월 15일부터 3일간 열린 주한총영사관에서의 공판에서 3주간 금고에 만기 후 선행보증으로 피고인 1,000달러, 보증인 1,000달러를 즉시 납부하라는 유죄판결을 받은 후 상해에 호송되어 3주간 금고생활을 하였습니다.


 1908년 7월 12일 서울로 돌아온 뒤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를 비서 A.W. 만함에게 넘기고 항일언론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9년 5월 1일 심장병으로 병사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995년 영국대사관은 한국프레스센터와 공동으로 그가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베델언론인장학금'을 제정하였으며,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자료출처 : 어니스트 베델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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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무어 - 내가 사랑한 조선(CGNTV QT)사무엘 무어 - 내가 사랑한 조선(CGNTV QT)

Posted at 2015.08.10 20:05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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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백정을 해방시킨 사무엘 무어 선교사 (모삼열 牟三悅)

 

    사무엘 무어 선교사


▲무어 선교사가 백정 박 씨를 전도하다.

이곳 양화진에 묻혀 있는 선교사님들 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은

사무엘 무어 Samuel F. Moore 선교사이다.


1892년 32세의 나이에,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뎠던 무어 선교사는

당시 서울의 곤당골(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곤당골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 안에 ‘예수 학당’을 설립해서, 조선인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수 학당’에는 ‘봉줄이’라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봉줄이는 백정 박 씨의 아들이었다.

(당시 백정에게는 성性만 있었지, 이름은 없었다. 매우 천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무어 선교사는, 봉줄이 아버지 백정 박씨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로 무어 선교사는 백정 박 씨의 집에 찾아가 문병했다.

그리고 동료 의료선교사 에이비슨에게 부탁해서, 백정 박 씨를 치료해 주었다.


에이비슨 선교사(제중원 4대 원장)는 당시 고종황제의 주치의였고, 후에 세브란스의대를 설립했다.

에이비슨 선교사의 수차례에 걸친 왕진 끝에, 백정 박 씨는 살아나게 되었다.


이제 완쾌된 백정 박씨는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무어 선교사는 그를 환대했다.

그는 후에 ‘박성춘’이런 이름도, 무어 선교사로부터 얻었고,

선교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백정 출신의 박성춘 때문에 곤당골교회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양반 교인들이, 천한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항의였다.

양반 교인들은, 무어 선교사에게, 그 백정을 교회에서 내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교회 출석을 거부했다. (당시 사회 관례상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양반 교인들을 만류했다.

그러나 양반 교인들은 강경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양반 교인들의 대표가 무어 선교사를 찾아왔다.

곤당골교회의 예배당 앞자리에 양반들을 위한 좌석을 별도로 마련해 주고,

백정을 그 뒷자리에 앉힌다면, 다시 교회에 출석하겠노라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어떤 경우에도

그런 차별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그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은, 마침내 곤당골교회와 결별해서

양반들 자신들만 모일 수 있는 홍문동교회를 설립했다.


▲박성춘, 백정들을 전도하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가장 입장이 난처해진 사람이... 백정 박성춘이었다.

자기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양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백정 박성춘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무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 시내의 백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원에 있는 백정들에게까지 찾아가서

‘백정을 사람대접해 주는 데가 있으니, 그 교회로 나오라’고 전도했다.

그래서 백정들이 ‘곤당골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시 교회가 합쳐지다

그 이후에, 곤당골교회에서 떨어져나간 양반교회, 즉 홍문동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들은 회개한 뒤에, 다시 무어 선교사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곤당골교회와 홍문동교회가 합쳐져서

1898년에 ‘중앙교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오늘날 승동교회의 전신)


그 때 중앙교회에 출석하는 1백여 명의 교인들 가운데,

무려 30명이 백정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교회를 가리켜 ‘백정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분 차별을 철폐한 중앙교회(곤당골교회)

몇 해 후에 백정 박성춘이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족이었던 이재형도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왕족, 양반, 백정이 명실상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는

진정한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차별 없는 복음’만을 믿었던,

즉, 예수님은 인간을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는 신념만을 굳게 믿었던

무어 선교사의 덕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어선교사는 당시 조선의 남녀차별, 부인학대 문화를 교정하고자 무지 애썼다.)


▲조선에 노예해방 운동을 펼치다

그 후에 백정출신 박성춘 장로는, 무어 선교사의 지도 아래

조선의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조정에 수차례 탄원서를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의 백정들은, 신분해방의 감격을 맛보게 된다.


백정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얻어서

-‘민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양반처럼 망건과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법률적으로 다른 모든 국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110년 전 조선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무어 선교사 한 사람이 생각과 마음을 굳게 고쳐먹고

온갖 반대와 위험을 무릅쓴 결과였다.


그러므로 마르다 허틀리 여사가 자신의 저서「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에서

무어 선교사에 의한 조선의 백정의 해방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고 명명하면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기쁨은

한국 백정들의 기쁨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 라고 책에 기술했다.


이처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차별 없는 복음을 증거 했던 무어 선교사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서 46세로 소천 하셨다. 묘소는 양화진에 안치되었다.

무어 선교사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 디딘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1904년 중앙 교회는 인사동(현 승동교회)으로 옮겼다. 인사동의 당시 교회 사진

 

▲한 사람의 헌신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었을 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한 사회의 병든 부분이 새로워지는데

그 14년은 충분히 긴 세월이었다.

바로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를 통해 14년간 계속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무어 선교사는 조선 땅에서 태어난 조선인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 조선은 그에게 이방 땅, 이방 민족이었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었을 때,

그 미국인 한 사람으로 인해서

수 백 년 동안 이 땅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백정들이 해방되는

출애굽의 大역사가 일어났다.


▲백정의 아들도 신분차별의 벽을 뛰어넘다.

봉줄이로 불리던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의 아들 역시,

박서영이란 어엿한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는 후에 제중원 의학원(세브란스의대 전신) 1회 졸업생이 되어서

그 뒤 10년 동안 에디슨 선교사와 함께, 의대 교수로 재직했다.


백정이 인간 취급을 못 받았기 때문에

백정의 아들 역시 인간 취급을 못 받던 사회였다.

그런데 인간일 수 없는 백정의 아들이 의대 교수가 되어,

당시 조선 사회의 최고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된 이야기가, 설교 몇 년 후에 <제중원>이란 SBS드라마에 소상히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무어 선교사에 의한 그 백정해방운동이

당시 조선사회와 조선인의 의식 변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

양화진 외국인 묘지 A구역에 있는, 무어 선교사의 비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忠僕: 충성스런 종


예수 안에서, 예수 때문에, 예수를 힘입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은 무어 선교사는

자기 한 사람의 변화가,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새 역사를 써내려갔다.


여러분과 나,

연약한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예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새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다.

 

2천 년 전에 베드로도 그랬는데...



◑무두장이 집에 머물렀던 베드로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유하니라 행9:43


성경에 베드로가 그냥 ‘욥바의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고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다고 특별히 기록한 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별히 시몬이 무슨 ‘백부장, 부자, 관리, 학자’ 등 내세울만한 직업도 아닌데,

시몬이 무두장이라고 굳이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두장이는 당시 천대받던 직업, 한국의 백정처럼! 

욥바의 많은 신자들은, 대사도 베드로를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 사도는, 모든 청을 다 거절하고,

굳이 무두장이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가죽 세공업자인 무두장이를 최하층 천민 취급했다.

이유인즉, 무두장이는 가죽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죽은 동물의 시체(부정한 것)를 만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몬의 집이 바닷가에 있었다고 했는데, 행10:6

어부도 아닌 무두장이가 바닷가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욥바의 유대인 사회가 그 무두장이를 소외시켰을 수도 있고,

자기가 스스로 소외되었을 수도 있다.


희한한 것은,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부정하다고 여기고,

무두장이가 손을 댄 모든 물건 역시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그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제품만은, 부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부정하기는커녕,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제품을 오히려 귀중품으로 다루었다.

즉, 이율배반적이었다.


▲대사도 베드로가 굳이 무두장이의 집을 유숙지로 선택한 이유

유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베드로는 ‘복음 안에서 신분 차별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두장이를 부정하다고(깨끗하지 못하다) 생각하는 유대인의 그릇된 관습에,

베드로는 지금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긋난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 같으면, 오히려 피하고 멀리 해야 할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는 일부러 그곳을 자기 유숙지로 정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당시 유대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면,

성경에 이 사실이 기록되었는가 하는 사실이다.


앞서 무어 선교사가 한국의 백정 신분해방을 위해 자기 몸을 던졌듯이,

행9장 욥바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악습타파와 복음 정신 회복을 위해 자기 온몸을 던지고 있다.

그 후로, 무두장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그릇된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는 사건으로 연결되다

대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를 방문해서 복음을 전한 사건은

일대 센세이션이었을 것이다.

 

그런 큰 사건도, 앞서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했기 때문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베드로 사도가, 무두장이 시몬을 무시하고 홀대하며 피했더라면,

그에게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전도하는 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보자기가 내려오는 꿈과 환상을 보았더라도, 그는 무시하고 말았을 것이다.


작은 일을 순종 못하는데, 큰일을 순종할 수 있겠는가?

시몬은 비록 무두장이였지만 엄연히 유대인이었고, 고넬료는 이방인이었다.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 <사회신분적 친민> 무두장이에게로 나아가다보니,

이제 <혈통적 천민>으로 취급했던, 이방인에게까지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베드로 한 사람이, 복음을 통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유대인 안에서 신분차별 철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 철폐라는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복음을 인해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변화가,

얼마나 큰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08.04.06.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http://blog.daum.net/rfcdrfcd/14539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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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무어 (모삼열) 선교사님 이야기 - 내가사랑한조선 CGNTV사무엘 무어 (모삼열) 선교사님 이야기 - 내가사랑한조선 CGNTV

Posted at 2015.06.24 21:18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사무엘 무어 (모삼열) 선교사님 이야기



 




 
무어는 '백정 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 해방운동의 조력자'로 칭해지는 인물입니다.
무어는 미국 매코믹 신학교 재학 중 언더우드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졸업 후 32세 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꾸준한 노방전도로 사람들을 모아서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열었습니다.
학생들 중에 관자골에 사는 백정 박씨의 아들 ‘봉주리 (Pong Choolie)’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봉주리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무어는 박씨를 여러 차례 위문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무어가 외국인 한 사람을 박씨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바로 고종의 주치의 에비슨이었습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스럽게 치료해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습니다.
박씨는 왕의 주치의가 짐승 같은 백정을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였고, 세례를 받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에 나오던 양반 교인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예배당 앞쪽에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졸랐습니다.
무어가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습니다.
한편 신분차별에 설움 당하던? 많은 백정들은 복음 안에 차별이 없다는 무어와 박성춘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3년 후인 1898년 가을에 곤당골 교회는 분리되었던 홍문동 교회와 다시 합하여 백정과 양반이 함께 예배 드리는 중앙교회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백정교회로 불렀습니다.
이후 중앙교회는 1905년 8월에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겨 이름도 승동교회가 되었습니다.

 
장티푸스에 걸렸다 살아난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의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1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백정 신분으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편, 박성춘은 승동교회(곤당골교회)에서 1911년 장로로 안수를 받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3년 후 왕손이던 이재형도 같은 승동교회에서 장로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차별 없는 복음을 직접 경험한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무어의 사역이 거두어들인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제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자료 출처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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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헤론 - 내가 사랑한 조선(CGNTV)존 헤론 - 내가 사랑한 조선(CGNTV)

Posted at 2015.06.17 11:18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내가사랑한조선






존 W. 헤론(John W. Heron)


앨 런과 마찬가지로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의료선교사였으며, 앨런보다 1년 뒤인 1885년에 입국하였습니다. 앨런이 귀국한 뒤 광혜원의 원장과 고종의 시의를 맡은 바 있습니다. 환자들을 돌보다 자신이 이질에 걸려 1890년 사망하였는데, 그의 묘가 현재의 합정동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리잡게 된 것을 계기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망하면 주로 이곳에 묘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흔히 ‘양화진 묘역’으로 알려진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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