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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베델 - 내가 사랑한 조선(CGNTV QT)

축복의통로 2015. 8. 1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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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 : 1872 ~ 1909)

 베델 선생은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완구점을 경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5세 때 일본에 건너와서 완구점을 경영하였습니다. 10여년 고생 끝에 약간의 자본을 마련하여 모직물업에 투자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데일리메일 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와 그해 7월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습니다. 그가 발행인으로 내세워진 것은 당시 일본인 검열관의 사전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신문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와 《런던 트리뷴》지에 게재하는 등 나라 안팎에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는 항일언론 활동을 벌이며 배일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제는 그를 추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주일 영국공사에게 그의 추방에 협력을 요청하는 한편, 통감부는 반일적인 신문기사를 구실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지만 추방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통감부는 1908년 5월 27일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논설이 일본인 배척을 선동한 이유로 영국상해고등법원에 선생을 다시 제소하였고, 6월 15일부터 3일간 열린 주한총영사관에서의 공판에서 3주간 금고에 만기 후 선행보증으로 피고인 1,000달러, 보증인 1,000달러를 즉시 납부하라는 유죄판결을 받은 후 상해에 호송되어 3주간 금고생활을 하였습니다.


 1908년 7월 12일 서울로 돌아온 뒤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를 비서 A.W. 만함에게 넘기고 항일언론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9년 5월 1일 심장병으로 병사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995년 영국대사관은 한국프레스센터와 공동으로 그가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베델언론인장학금'을 제정하였으며,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자료출처 : 어니스트 베델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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