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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은 넘어야 할 장벽 - 뉴스미션(국민일보)

축복의통로 2013. 8. 1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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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은 넘어야 할 장벽

“더러는 선교사가 되어 이 땅을 찾아 온 부모를 따라왔다가 세상을 떠났겠고, 더러는 이 땅에서 태어났다가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간 아이들이었으리라. 어떤 것은 묘비도 없이 흙무덤이 흘러내려서 평지나 다름없이 주저앉은 묘도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다가 무슨 까닭으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낯선 땅에서 낯설어하며 살다가 외롭게 세상을 떠났을 것만은 분명한 일이었다. 가엾은 아기들, 고향이 없는 어린 영혼들.” 정연희의 소설 ‘양화진’에 등장하는 아기무덤에 대한 묘사다. 설명은 마치 복음서에 등장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 13)와 닮았다. 실제로 지난 4일 찾은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사진)엔 아기무덤만 따로 조성한 곳이 있었다. 총 64기의 묘는 1960년대까지 한국에 살던 외국인 자녀들의 무덤이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백시열 사무국장에 따르면 양화진선교사묘원 무덤의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하거나 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름이 있기도, 없기도 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다. 더러는 장티푸스와 이질 등 당시 만연된 질병으로 사망했다. 양화진 묘원에 안치된 선교사 묘는 모두 145기. 그중엔 1903년 원산부흥의 주역이었던 하디 선교사의 두 딸도 묻혔고, ‘한국의 친구’로 불렸던 헐버트 선교사와 그 아들도 묻혀 있다. 이들은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져 한국교회 부흥의 초석이 됐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1994년 펴낸 ‘내한선교사총람’에 따르면 1885년부터 한국을 찾은 외국인 선교사는 90년대 중반까지 총 2956명이었다. 그중 1529명의 선교사가 광복 이전에 한국 땅을 밟았고 이들 가운데 10%는 질병과 사고로 한국에 뼈를 묻었다. 이들은 자녀를 잃기도 했고 배우자와 사별하는가 하면 본인이 죽음을 맞아야 했다.

지난 6월 18일 캄보디아 선교지로 향하던 고(故) 방효원·김윤숙 선교사 부부와 두 자녀 역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방 선교사가 소속된 인터서브코리아 박준범 대표는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그 의미를 헤아릴 수는 없다”며 “고난은 항상 풀리지 않는 신비이고 끝나지 않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선교사들은 이처럼 고난과 직면해 있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은 이전에 비해 줄었지만 요즘엔 사고와 범죄, 정치적 이유로 애매한 고난을 당하기 일쑤다. 고난은 언제나 선교와 동의어다. 실과 바늘처럼 미션 수행 현장엔 고통이 따라온다.

선교 역사는 언제나 고난의 역사였다. 헤아릴 수 없는 선교사들이 죽거나 다쳤고 정신적 고통을 맞았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특히 극심했다. ‘검은 대륙’에서 선교사들을 괴롭힌 것은 사람이 아니라 질병이었다. 말라리아와 황달병, 장티푸스, 이질로 선교사들은 포기하거나 돌아가야 했다. ‘세계선교역사’의 저자 허버트 케인 교수는 “아프리카 선교 비화는 모험과 인내, 궁핍, 쇠약, 죽음으로 점철되는 눈물겨운 이야기”라고 전했다.

중국 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메케이는 우간다로 떠나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6개월 이내에 당신들은 아마 우리들 중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을 때 낙담하지 말고 다른 누군가를, 그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즉시 보내십시오.”

메케이 선교사 일행이 떠난 후 3개월 안에 8명 중 3명이 죽었고 1년 후엔 2명의 죽음이 추가됐다. 다시 1년 후엔 메케이 선교사 혼자 살아남았다. 그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12년을 싸우다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서부 아프리카는 아예 ‘백인들의 무덤’으로 불렸다. 시에라리온 교회선교부는 초기 20년 동안 53명의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라이베리아 최초의 미국 감리교 선교사 멜빌 콕스는 1833년 도착 후 4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1000명이 죽더라도 아프리카를 포기하지 말게 하소서”였다.

중국도 고난이 심했다. 1900년 발생한 의화단 사건때 189명의 선교사들과 그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에서 순교했던 선교사 중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에릭 리델도 있었다. 중국 선교사의 자녀인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육상 400m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올림픽의 영광과 기쁨을 뒤로 한 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후 20년을 사역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가택연금을 당했고 영양 부족 등으로 숨지고 말았다. 그의 불꽃같은 삶은 영화 ‘불의 전차’에 소개됐다.

선교사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그들이 전했던 메시지에 대한 현지의 무반응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이는 육체의 고통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호감을 얻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배척을 받았다. 미국 최초의 미얀마 선교사이자 미얀마어 성경을 완성했던 아도니람 저드슨은 1813년 당시 수도 양곤에 도착한 후부터 온갖 수난을 겪었다. 영원한 신에 대한 개념이 없던 주민들은 복음을 들을 생각도 않했다. 첫 개종자는 6년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

선교사들은 이 모든 난관을 뚫고 복음을 전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에 힘썼다. 그들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었다. 2010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살해된 의료 봉사단장 톰 리틀의 부인 리비 리틀 여사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은 세상 사람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며 믿음의 고백을 남겼다.

지난해 11월 3일, 불법 동영상을 촬영하고 소지했다는 이유로 북한 정부에 억류돼 수감 중인 케네스 배(45·한국명 배준호)씨 역시 고난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 지난 4월 가족과의 전화 통화에서 배씨는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 주님은 놀라운 분이시며 찬송받기에 합당하다”고 고백했다고 여동생 테리 정씨는 전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 한정국 사무총장은 “고난과 선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며 “선교사들은 고난의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에 고통을 감내한다”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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