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기도하며/영성나눔
성소를 짓듯, 영화를 만들다 - 추상미 집사
성소를 짓듯, 영화를 만들다 - 추상미 집사 @표인봉 윤유선의 하늘빛향기
“그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1951년, 한국전쟁 고아 1,500명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졌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었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마마’, ‘파파’라 부르며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8년 후,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송환 명령을 받게 되는데…
2018년, 아이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지금까지도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역사 속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가슴에 남아있는 위대한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 추상미 감독과 탈북소녀 이송, 남과 북 두 여자가 함께 떠나는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PROLOGUE
1951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가 폴란드로 간 이유는?
역사에 가려져있던 비밀 실화 전격 공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전쟁 고아 약 10만 명 추산 1951년, 한국전쟁 고아 1,500명 폴란드에 도착
1959년, 북한 천리마운동의 본격화로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 전원 북한 송환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와 폴란드 선생님들의 비밀 실화,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폴란드 선생님들의 위대한 사랑.
그 위대한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 폴란드로 향한 추상미 감독과 탈북소녀 이송,
그곳에서 알게 된 1,500명의 고아들이 남과 북에서 모인 우리 아이들이었다는 놀라운 사실까지…
남과 북 두 여자와 함께 떠나는 치유와 힐링의 여정을 그린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국경과 인종, 이념, 시대를 초월한 가슴 뜨거운 감동의 실화로 스크린을 물들일 것이다.
[ ABOUT MOVIE ]
부산국제영화제 전석 매진! 태풍도 막지 못한 열정으로 객석 가득 채웠다!
5년 만에 돌아온 추상미 감독, ‘재회의 염원’ 담은 메시지로 영화제를 빛내다
2013년 영화 <영향 아래의 여자>로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 한국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돼 화제를 모았던 추상미 감독이 5년 만에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로 다시 부산을 찾았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공식 초청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깊이 있는 메시지와 유의미한 소재, 높은 완성도를 인정 받았다. 와이드 앵글 부문은 영화의 시선을 넓혀 색다르고 차별화된 비전을 보여주는 수작을 모아 선보이는 섹션으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전쟁 고아들의 비밀 실화를 스크린에 옮겨내 화제를 모았다.
공식 포스터와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를 통해 ‘재회의 장’이라는 개최 이념을 밝힌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초청작으로 선정, 그 의미를 또 한번 되새겼다. 전쟁으로 잃은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재회의 염원을 그리는 황영성 화백의 ‘가족 이야기’ 원화를 배경으로, 영문자 ‘BUSAN’을 4개의 이미지로 분절한 공식 포스터는 4개가 모두 모였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글자처럼 국내외 영화인과 관객이 다시 만나는 ‘재회’의 장이 되고자 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소망을 담았다. 뿐만 아니라 개막작으로 상영되는 탈북 여성 실화 <뷰티풀 데이즈>와 초청작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그 의미를 더욱 확장시켜 오랜 세월 가깝고도 먼 곳에 떨어져 있었던 남한과 북한이 ‘재회’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을 전한다. 특히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한국전쟁 고아의 비밀 실화를 바탕으로, 위대한 사랑을 찾아가는 남과 북 두 여자의 동행을 담은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6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폴란드 선생님들의 재회를 향한 희망을 담은 작품으로, 영화제의 개최 이념에 걸 맞는 뜻 깊은 메시지를 전하며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 일반 티켓 예매 오픈 후 2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호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은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태풍이 부산을 관통하는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온다면 참석하겠다는 추상미 감독의 의지와 강한 비바람을 뚫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뜨거운 열정에 힘입어 객석을 가득 메우며 최고의 화제작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5년 만에 돌아 온 추상미 감독의 의미 있는 첫 행보에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가슴 먹먹한 감동으로 영화제를 빛낸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올가을 스크린을 더욱 따뜻하게 물들일 예정이다.
2018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폴란드로 간 아이들>
이념과 사상, 국경을 뛰어넘은 평화의 메시지 전하다!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평양에서 개최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가운데,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2018년, 오랜 세월 남북이 지녀 온 기나긴 상처를 아물게 할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는 역사적인 자리이자, 2000년 김대중 대통령, 2007년 노무현 대통령에 이은 세 번째 평양회담으로 더욱 주목 받은 이번 제3차 남북정상회담은 '평화, 새로운 미래’를 주제로 하여, 비핵화를 비롯해 남북 관계 발전, 한반도 번영을 위한 방안들이 제시되며 여느 때보다 뜨거운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역사적인 성과를 이뤄낸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힘입어 한반도에 평화를 향한 의지가 가득 찬 가운데, 스크린에서는 1950년대 한국전쟁 고아들의 비밀 실화를 다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분단의 아픔을 뛰어넘는 위대한 사랑의 메시지로 현 시국에 특별한 의미를 전할 예정이다. 한국전쟁 중 북한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를 보내고 다시 송환하기까지의 실화를 담은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아이들의 8년간 발자취를 보여주며 한국전쟁이 가져다 준 비극과 상처, 그리고 이를 사랑으로 품어준 폴란드 선생님들의 진심을 담아 이념과 사상, 국경, 계층, 세대를 뛰어넘는 평화의 메시지를 선사한다. 특히 남과 북의 두 여자, 추상미 감독과 탈북소녀 이송이 함께 떠나는 이 여정은,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을 거쳐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남북관계가 급변하는 이 시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로 남북관계 개선에 초미의 관심이 집중되며 ‘평화’의 메시지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이 더욱 간절해지는 올가을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한국전쟁이 남긴 아픈 상처를 사랑으로 품었던 위대한 실화를 통해 잊지 못할 감동을 전한다.
폴란드 공동묘지에서 한글로 된 묘비 발견!
다큐멘터리 ‘김귀덕’과 소설 [천사의 날개] 속 비밀 실화, 이제 한국에서 밝혀진다!
폴란드 언론인 욜란타 크리소바타와 극작가인 친구 패트릭 요카는 패트릭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던 폴란드의 한 공동묘지에서 한 의문의 묘지를 발견했다. “김귀덕 Kim Ki Dok. 13년의 생을 살았고, 1955년 9월 20일 세상을 떠났다”라는 폴란드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는 묘비명을 본 두 사람은 대체 어떠한 이유로 1955년 폴란드에 동양인 소녀의 묘지가 만들어졌는지 호기심을 가졌다. ‘김귀덕’의 묘지에서 시작된 이들의 호기심은 1951년 폴란드로 비밀리에 보내진 1,500명 한국전쟁 고아의 숨겨진 비밀 실화를 찾아냈다.
욜란타 크리소바타와 패트릭 요카는 이 충격적인 비밀 실화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고, 2003년 폴란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공개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이후 2006년 폴란드 공영방송 TVP에서 ‘김귀덕(Kim Ki Dok)’ 다큐멘터리 영화로 방영되며 베를린 언론 페스티벌에서 PRIX EUROPA상과 그랑프리 수상을 비롯해 여러 언론상을 휩쓸었다. 또한 욜란타 크리소바타는 1,500명 한국전쟁 고아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2013년 소설 [천사의 날개]를 발간한 바 있다. 이처럼 8년간의 한국전쟁 고아들이 폴란드에서의 겪은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와 소설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추상미 감독은 다큐멘터리 ‘김귀덕’과 소설 [천사의 날개]를 통해 알려진 폴란드로 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의 비밀 실화 속에서도 특히 아이들의 상처를 사랑으로 품은 폴란드 선생님들의 위대한 사랑에 집중했다.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아이들을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선생님들의 마음이 영상과 문자를 넘어 고스란히 전해지며 추상미 감독으로 하여금 그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심을 찾아가게 했다. 폴란드의 시선에서 바라본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남과 북 두 개의 시선을 통해 찾아가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여정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폴란드로 간 1,500명 한국전쟁 고아의 절반은 남한 아이들이었다!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들이 폴란드에 도착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폴란드는 아이들의 건강검진을 위해 흉부 X-Ray 촬영을 했다. 아이들의 폐에서 수많은 기생충이 발견됐는데, 의사들은 이 기생충을 종류별로 어느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지 조사해 지도 위에 표시한 결과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났다. 기생충의 서식지가 남한과 북한으로 정확히 절반씩 양쪽으로 구분된 것. 이 결과는 폴란드로 보내진 한국전쟁 고아들 중, 남한 출신의 아이들도 절반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치열한 전쟁 중에 한반도의 전선은 수시로 이동했고, 전선이 이동할 때마다 북한이 점령했던 지역의 고아들을 전부 모았기 때문에 남한의 아이들도 포함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1959년, 폴란드로 간 1,500명의 아이들은 전원 북한으로 송환 명령을 받았고, 이때 남한의 아이들도 함께 북한으로 모두 이송됐다. 역사에서 잊혀져 가는 아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폴란드에 도착한 추상미 감독은 북한의 아이들만이 아닌 남한의 아이들도 함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처음으로 듣게 된다. 추상미 감독은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 충격적인 비밀 실화를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로부터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시작됐다.
실력파 배우에서 차세대 여성 감독으로
만능 아티스트 추상미, 특별한 스크린 복귀 예고!
연극 [로리타](1994)로 데뷔한 추상미는 연극 [바람분다 문열어라]로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영화 <꽃잎>(1996)으로 스크린에 데뷔하며 평단과 대중을 모두 사로잡았다. 영화 <접속>, <생활의 발견>, <누구나 비밀은 있다>, <열세살, 수아> 등과 드라마 [해바라기], [노란 손수건], [사랑과 야망], [시티 홀] 등을 통해 2003년 KBS 연기대상 우수연기상, 2006년 SBS 연기대상 연속극부문 조연상을 수상하며 실력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처럼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MC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으로 신뢰를 쌓아온 추상미가 최근 감독으로 새로운 도전장을 던져 관심을 집중시킨다.
첫 공연을 앞두고 공황상태에 빠진 여주인공의 복잡한 심리를 다룬 단편 영화 <분장실>(2010)으로 첫 메가폰을 잡은 추상미는 제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고 두 번째로 연출을 맡은 단편 <영향 아래의 여자>(2013)는 3건의 계약을 완료해야 하는 보험설계사의 하루를 그린 작품으로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배우는 물론 감독으로서도 인정받은 만능 아티스트 추상미가 첫 장편,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로 5년 만에 특별한 스크린 복귀를 앞두고 있어 화제를 일으켰다. 어느 날 우연히 북한 꽃제비의 실상이 담긴 방송을 본 추상미 감독은 모성애를 넘어서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며 펑펑 울었고, 그 후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한 출판사에서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가 폴란드로 보내진 비밀 실화를 우연히 접하는 운명적 경험이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탄생 계기가 됐다. 추상미 감독은 70년 전 아이들을 회상하며 눈물 흘리는 폴란드 선생님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이상했다. 무슨 감정이었을까? 이 교사들과 아이들 사이에 어떤 유대관계가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고 직접 폴란드로 떠났다. 다른 민족의 상처를 사랑으로 품었던 폴란드 선생님들을 직접 만나고,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스크린에 담은 추상미 감독이 선사할 위대한 사랑의 메시지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상처가 사랑이 되다!
한국전쟁 고아들과 폴란드 선생님의 역사적 평행이론
한국전쟁 고아들이 폴란드에 도착한 1951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많은 핍박과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부는 소련에 의해, 서부는 독일에 의해서 분할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같은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파리에서 런던으로 망명정부를 옮겨가며 치열한 항전을 이어나간 폴란드는 독일의 패전으로 독립을 맞이한다. 당시 폴란드 고아원의 90% 이상이 전쟁 고아로 가득 찼을 정도로 폴란드는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겪었다.
한국전쟁 고아들이 전쟁으로 인해 받은 상처를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던 폴란드 선생님들은 1951년, 낯선 나라에 도착한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했다. 실제로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아이들을 보살폈던 양육교사 중 상당수가 전쟁 고아 출신이었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저씨, 아주머니, 원장, 교사 등의 호칭 대신 아이들에게 ‘아빠’, ‘엄마’로 불리며 가족 같은 유대감으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했다. 프와코비체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연극을 공연하는 등 다양한 예술 활동과 스포츠를 통해 사춘기 아이들의 동심을 회복시켰다. 부모 못지 않은 폴란드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아이들도 전쟁의 상처에서 서서히 벗어났고 폴란드에서 짧지만 행복한 순간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폴란드 선생님들과 한국전쟁을 겪은 아이들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하게 된 이 놀라운 역사적 평행이론은 위대한 사랑의 메시지에 진정성을 더하며 가슴을 울린다.
[ PRODUCTION NOTE ]
추상미 감독과 탈북소녀 이송
남과 북 두 여자가 함께 폴란드로 힐링의 여정을 떠나다!
추상미 감독은 폴란드로 비밀리에 보내진 한국전쟁 고아들의 실화를 알게 된 추상미 감독은,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실화였기에 다큐멘터리로서의 기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당시 아이들의 상처를 사랑으로 품은 폴란드 선생님들이 살아계실 때 생생한 증언과 모습을 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또한 이 실화를 영화로 준비하던 중 만난 탈북소녀 이송에게 함께 폴란드로 가자고 제안한 추상미 감독은, 1951년 폴란드로 간 1,500명의 아이들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전쟁의 아픔까지 이야기하고자 했다.
처음 폴란드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이 많았다는 이송은 “말을 하지 않아도 나의 아픔을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추상미 감독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밝혔다. 이송은 폴란드에서 아이들이 실제 머물던 장소를 찾아가고 폴란드 선생님들을 만나 직접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며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었다. “폴란드에 오기로 결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픔에서 조금은 빠져 나올 수 있었고 스스로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고백해 훈훈함을 자아냈다.
추상미 감독 역시 이송과 폴란드에서의 여정을 함께 하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송과 함께 다니며 다양한 북한의 문화를 접한 추상미 감독은 영화의 시작과 끝에 이송이 부르는 북한 노래인 ‘기다려다오’를 삽입하기도 했다. 마치 폴란드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계처럼, 추상미 감독은 이송에 대해 “엄마와 딸의 관계로 평생 이어갈 것”이라며 영화 속 두 여자가 펼칠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향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1,500명 전원 북한 송환된 후, 북한에서 편지가 오다
재회를 꿈꾸는 아이들의 간절한 소원 감동 선사!
1959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들이 북한으로 전원 송환된 후, 폴란드 교사들에게 북한에서 온 편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편지들은 아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부터 쓴 것이었고, 비뚤비뚤한 글씨와 번진 잉크자국은 예기치 못한 이별을 맞이한 아이들의 슬픔을 가늠케 했다. 북한에서 온 편지 속에는 폴란드와 선생님을 향한 아이들의 그리움과 북한에서의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기술학교에 진학한 학생들도 있었고 채석장이나 벌판에서 일한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연필과 편지봉투, 공책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받고 폴란드 선생님들은 북한의 상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한 남자 아이는 유제프 보로비에츠 양육원 원장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다시 폴란드로 데려가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유제프 원장은 그 편지가 전해지는 도중에 누군가 내용을 읽고 아이에게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걱정에 차마 답장을 하지 못했지만, 아이의 편지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1961년 아이들이 북한으로 송환된 2년 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북한에서 오던 편지가 일제히 멈췄고 폴란드 교사들은 더 이상 아이들로부터 편지를 받을 수 없었다.
{ 북한에서 온 편지 ① }
저는 언젠가는 꼭 폴란드에 다시 가게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책도 읽고 길을 걸을 때면 폴란드어를 중얼거려보곤 합니다. 왜 노래책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러시아어를 많이 배우고 있어요. 만약 제가 폴란드어를 잊어버리게 되면 러시아어로 마마에게 편지를 보낼게요. 저는 계속해서 편지를 쓸 거예요. 왜냐하면 마마를 잊을 수 없으니까요.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예요.
{ 북한에서 온 편지 ② }
파파! 폴란드 학교가, 선생님들이, 그 중에서도 파파가 제일 많이 생각이 납니다. 아마도 파파 같은 분은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파파가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1958년 정원에서 파파가 물을 주고 있었고 저는 쪽문 옆에 서 있었어요. 그 때 장학관이 제게 와서 한국말로 저더러 화단에 물을 주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저는 물 호스를 들어 올렸는데, 잘못해서 파파를 향해 물을 뿌렸고 파파는 물에 흠뻑 젖었어요. 그때 파파가 껄껄 웃으시면서 아마도 이 순간을 절대 못 잊을 거라고 하셨었어요. 저를 기억하세요, 파파? 올해 정원은 어떤가요? 꽃들이 활짝 피었나요?
SPECIAL KEYWORD
#1. 천사의 집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한국전쟁 고아들은 폴란드 남서부의 작은 시골 마을 프와코비체로 이송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사용한 의료시설을 개조하여 한국전쟁 고아들을 위한 양육원 ‘천사의 집’이 마련됐다. 13개의 캠프로 이루어진 숙소와 병원, 원장실, 행정실, 의류 및 식품 저장소, 구내식당, 직원 처소, 세탁실, 재단실, 학교 등이 인적이 드문 숲 속에 세워졌다. 마을 전체가 양육원이나 다름없던 프와코비체는 아이들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2. 600여 명의 양육인
1950년대 폴란드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한국전쟁 고아들을 위해 양질의 식사와 의료, 교육을 제공하며 최선을 다해 보살폈다. 교사를 비롯해 요리사, 청소부, 의사 등 직원의 수만 해도 6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그들은 프와코비체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는 비밀각서에 서명해야 했다. 특히 300여 명의 폴란드 교사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족을 잃거나 고아가 된 빈민 출신이었고, 이제 갓 교사 자격증을 딴 20대 초부터 30대 초까지의 열정적인 청년들이었다. 교사들은 자신을 선생님이 아닌 엄마, 아빠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며 부모의 마음으로 아이들의 상처를 품었다.
#3. 북한의 규칙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와 함께 북한에서 온 10여 명의 교사가 프와코비체에 머물렀다. 아이들의 교육을 맡은 북한의 장학관은 엄격한 규칙을 요구했다. 폴란드 교사들이 아이들을 껴안고, 쓰다듬고, 애정표현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등 특별히 대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또한 장난감이나 인형, 이념에 맞지 않는 책과 그림을 배우면 안되고, 노래는 북한에서 가져온 노래책에 수록된 동요만 가능했다.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은 숙소와 식당, 운동장, 교실에서도 함께 있어서는 안됐다. 또한 북한 측은 폴란드어를 배울 수 있도록 허용되었지만 폴란드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금지하기도 했다.
#4. 김귀덕
프와코비체 양육원에 있던 한국전쟁 고아 중 김귀덕이라는 한 소녀는 희귀병으로 프와코비체를 벗어나 다른 도시의 병원으로 이송됐다. 김귀덕은 피부에 출혈이 나타나는 자반병의 하나인 베를호프병을 앓고 있었고, 담당 의사는 그녀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수혈했다. 당시 폴란드에서 수혈하는 방법은 혈관에서 혈관으로 직접 옮기는 방식뿐이었다. 김귀덕은 처음 일주일에 한번 수혈에서 곧 3~4일에 2번의 수혈이 필요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고 담당 의사는 아는 사람, 병원 직원 등 혈액형만 맞으면 병원으로 데리고 와 수혈을 했다. 담당 의사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귀덕은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무덤은 지금도 폴란드 공동묘지에 남아있다.
#5. 금지된 러브스토리
프와코비체 ‘천사의 집’에서는 북한과 폴란드의 금지된 러브스토리가 싹트기도 했다. 북한에서 온 남자 교사와 폴란드인 여자 교사는 사랑에 빠졌고, 여자 교사가 임신하자 결혼하기 위해 북한 대사관에 동의서를 요청했다. 하지만 남자 교사가 북한 대사관으로 동의서를 받으러 떠난 날 바로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또 다른 북한의 여자 교사와 폴란드의 남자 교사도 서로 사랑했지만 이내 여자 교사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며 생이별하게 된다. 이들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가 있은 후, 더 이상 북한과 폴란드 교사 사이에 로맨스는 없었다고 한다.
출처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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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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