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 은나라의 충신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수양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충절을 지키고자 한 행동입니다. 일제 강점기, 매하 양태승은 속리산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당시 북에는 오산고보, 남에는 고창고보가 있어서 ‘북오산 남고창’이라 했습니다. 일제는 위안부와 학병 동원에 교사와 지식인을 앞장세웠습니다. 해직당하지 않으려면 창씨개명을 하라고 핍박했습니다. 많은 지식인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고창고보를 세운 양태승 선생은 “굶어죽을지언정 창씨개명은 못한다”며 속리산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10여년 전 ‘매하 양태승 평전’이 출간되고, 201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된 일은 늦게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치하에서 세속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순수한 믿음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던 열성파들이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이른바 광야의 영성, 사막의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입니다. 광야에서 심신의 고통과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오직 하나님께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고행을 자초한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하나님만이 최고의 관심사였으며, 철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것들로 믿음생활이 혼탁해졌습니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44914&code=23111512&sid1=fai&sid2=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