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성장배경,보구여관에 근무
여메레는 1872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남편의 성을 따 황메례 혹은 양메례로도 불렀다. 메례는 그가 1889년 세례를 받을 때 선교사에게 받은 이름 "메리"의 한자명이다.
그는 마산에서 여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가정환경을 밝힐 자세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어려서 그를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톤(M.F.Scranton)부인의 양딸로 보내졌다. 스크랜톤 부인은 그를 자기가 설립한 이화학당에 입학시켜 신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가 이화학당에서 수학한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스크랜톤 부인은 그를 "이화학당 초기 학생의 한 사람" 으로 기록하고 있어 1886-99년 사이에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크랜톤 부인의 집에 기거하며 공부하면서 상동교회에 출석하였고 정동에 있는 여성병원 보구여관에 홀 부인의 조수로 근무하였다. 여메례는 특히 영어회화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899년 전후로 해서 그는 황씨성을 가진 사람과 결혼했다. 이때부터 그는 여메례에서 황메례로 성을 바꾸었다. 그러나 결혼한지 3개월만에 그의 남편은 혼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미국 유학길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사망하여 그는 과부가 되었다. 신혼 3개월 만에 과부가 된 황메례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보구여관의 전도부인으로 선교사업에 몰두하였며 뛰어난 영어회화 실력으로 광무황제 앞에 들어가 어전통역을 하기도 했다.
2. 여성운동을 시작
그는 1901년 정동교회 여성신도 63명을 규합하여 보호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한국교회 첫 여성 조직체로서 오늘의 여선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또 1903년에는 모교인 이화학당에 학생 자치단체인 "러빙 소사이어티"(Loving Society) 를 창설하여 지도하였으며 하란사와 함께 스크랜톤의 교육사업을 적극 후원하였다.
1903년 그는 일본의 교육기관을 시찰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현대신 여성교육기관의 활발한 활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고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도 근대교육기반의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1904년 스크랜톤 부인이 담당하고 있는 상동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엡워드여자청년회를 조직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또 수원에 있는 삼일여자학교에까지 가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3. 진명여학교 설립
일본 사찰후 양장으로 의복을 바꾼 그는 단순한 개화여성이 아니라 선구적인 여성교육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가 가르치던 학생중에 고종황제의 후비인 엄비의 사촌동생 엄준원의 딸이 있었다. 그래서 엄준원은 그를 엄버에게 소개하여 그의 여학교 설립의 꿈을 진언하게 되었다.
어전 통역으로 이미 궁내부에서 신임을 얻었던 그는 마침내 학교설립 허가를 받고 1906년 창성궁 건물을 교사로 하사받고 진명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 개교한 이 학교 교장엔 엄준원이 취임하였으나 학교운영의 실질적인 업무는 학감으로 취임한 황메례가 맡아 처리했다.
다큐 '女선교사 조선을 비추다' - 메리 스크랜턴과 로제타 홀 https://youtu.be/gcIOOAHck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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