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백정을 해방시킨 사무엘 무어 선교사 (모삼열 牟三悅)
사무엘 무어 선교사
▲무어 선교사가 백정 박 씨를 전도하다.
이곳 양화진에 묻혀 있는 선교사님들 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은
사무엘 무어 Samuel F. Moore 선교사이다.
1892년 32세의 나이에,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뎠던 무어 선교사는
당시 서울의 곤당골(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곤당골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 안에 ‘예수 학당’을 설립해서, 조선인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수 학당’에는 ‘봉줄이’라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봉줄이는 백정 박 씨의 아들이었다.
(당시 백정에게는 성性만 있었지, 이름은 없었다. 매우 천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무어 선교사는, 봉줄이 아버지 백정 박씨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로 무어 선교사는 백정 박 씨의 집에 찾아가 문병했다.
그리고 동료 의료선교사 에이비슨에게 부탁해서, 백정 박 씨를 치료해 주었다.
에이비슨 선교사(제중원 4대 원장)는 당시 고종황제의 주치의였고, 후에 세브란스의대를 설립했다.
에이비슨 선교사의 수차례에 걸친 왕진 끝에, 백정 박 씨는 살아나게 되었다.
이제 완쾌된 백정 박씨는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무어 선교사는 그를 환대했다.
그는 후에 ‘박성춘’이런 이름도, 무어 선교사로부터 얻었고,
선교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백정 출신의 박성춘 때문에 곤당골교회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양반 교인들이, 천한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항의였다.
양반 교인들은, 무어 선교사에게, 그 백정을 교회에서 내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교회 출석을 거부했다. (당시 사회 관례상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양반 교인들을 만류했다.
그러나 양반 교인들은 강경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양반 교인들의 대표가 무어 선교사를 찾아왔다.
곤당골교회의 예배당 앞자리에 양반들을 위한 좌석을 별도로 마련해 주고,
백정을 그 뒷자리에 앉힌다면, 다시 교회에 출석하겠노라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어떤 경우에도
그런 차별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그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은, 마침내 곤당골교회와 결별해서
양반들 자신들만 모일 수 있는 홍문동교회를 설립했다.
▲박성춘, 백정들을 전도하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가장 입장이 난처해진 사람이... 백정 박성춘이었다.
자기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양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백정 박성춘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무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 시내의 백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원에 있는 백정들에게까지 찾아가서
‘백정을 사람대접해 주는 데가 있으니, 그 교회로 나오라’고 전도했다.
그래서 백정들이 ‘곤당골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시 교회가 합쳐지다
그 이후에, 곤당골교회에서 떨어져나간 양반교회, 즉 홍문동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들은 회개한 뒤에, 다시 무어 선교사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곤당골교회와 홍문동교회가 합쳐져서
1898년에 ‘중앙교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오늘날 승동교회의 전신)
그 때 중앙교회에 출석하는 1백여 명의 교인들 가운데,
무려 30명이 백정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교회를 가리켜 ‘백정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분 차별을 철폐한 중앙교회(곤당골교회)
몇 해 후에 백정 박성춘이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족이었던 이재형도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왕족, 양반, 백정이 명실상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는
진정한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차별 없는 복음’만을 믿었던,
즉, 예수님은 인간을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는 신념만을 굳게 믿었던
무어 선교사의 덕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어선교사는 당시 조선의 남녀차별, 부인학대 문화를 교정하고자 무지 애썼다.)
▲조선에 노예해방 운동을 펼치다
그 후에 백정출신 박성춘 장로는, 무어 선교사의 지도 아래
조선의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조정에 수차례 탄원서를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의 백정들은, 신분해방의 감격을 맛보게 된다.
백정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얻어서
-‘민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양반처럼 망건과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법률적으로 다른 모든 국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110년 전 조선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무어 선교사 한 사람이 생각과 마음을 굳게 고쳐먹고
온갖 반대와 위험을 무릅쓴 결과였다.
그러므로 마르다 허틀리 여사가 자신의 저서「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에서
무어 선교사에 의한 조선의 백정의 해방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고 명명하면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기쁨은
한국 백정들의 기쁨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 라고 책에 기술했다.
이처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차별 없는 복음을 증거 했던 무어 선교사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서 46세로 소천 하셨다. 묘소는 양화진에 안치되었다.
무어 선교사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 디딘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1904년 중앙 교회는 인사동(현 승동교회)으로 옮겼다. 인사동의 당시 교회 사진
▲한 사람의 헌신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었을 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한 사회의 병든 부분이 새로워지는데
그 14년은 충분히 긴 세월이었다.
바로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를 통해 14년간 계속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무어 선교사는 조선 땅에서 태어난 조선인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 조선은 그에게 이방 땅, 이방 민족이었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었을 때,
그 미국인 한 사람으로 인해서
수 백 년 동안 이 땅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백정들이 해방되는
출애굽의 大역사가 일어났다.
▲백정의 아들도 신분차별의 벽을 뛰어넘다.
봉줄이로 불리던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의 아들 역시,
박서영이란 어엿한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는 후에 제중원 의학원(세브란스의대 전신) 1회 졸업생이 되어서
그 뒤 10년 동안 에디슨 선교사와 함께, 의대 교수로 재직했다.
백정이 인간 취급을 못 받았기 때문에
백정의 아들 역시 인간 취급을 못 받던 사회였다.
그런데 인간일 수 없는 백정의 아들이 의대 교수가 되어,
당시 조선 사회의 최고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된 이야기가, 설교 몇 년 후에 <제중원>이란 SBS드라마에 소상히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무어 선교사에 의한 그 백정해방운동이
당시 조선사회와 조선인의 의식 변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
양화진 외국인 묘지 A구역에 있는, 무어 선교사의 비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忠僕: 충성스런 종
예수 안에서, 예수 때문에, 예수를 힘입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은 무어 선교사는
자기 한 사람의 변화가,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새 역사를 써내려갔다.
여러분과 나,
연약한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예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새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다.
2천 년 전에 베드로도 그랬는데...
◑무두장이 집에 머물렀던 베드로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유하니라 행9:43
성경에 베드로가 그냥 ‘욥바의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고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다고 특별히 기록한 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별히 시몬이 무슨 ‘백부장, 부자, 관리, 학자’ 등 내세울만한 직업도 아닌데,
시몬이 무두장이라고 굳이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두장이는 당시 천대받던 직업, 한국의 백정처럼!
욥바의 많은 신자들은, 대사도 베드로를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 사도는, 모든 청을 다 거절하고,
굳이 무두장이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가죽 세공업자인 무두장이를 최하층 천민 취급했다.
이유인즉, 무두장이는 가죽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죽은 동물의 시체(부정한 것)를 만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몬의 집이 바닷가에 있었다고 했는데, 행10:6
어부도 아닌 무두장이가 바닷가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욥바의 유대인 사회가 그 무두장이를 소외시켰을 수도 있고,
자기가 스스로 소외되었을 수도 있다.
희한한 것은,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부정하다고 여기고,
무두장이가 손을 댄 모든 물건 역시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그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제품만은, 부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부정하기는커녕,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제품을 오히려 귀중품으로 다루었다.
즉, 이율배반적이었다.
▲대사도 베드로가 굳이 무두장이의 집을 유숙지로 선택한 이유
유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베드로는 ‘복음 안에서 신분 차별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두장이를 부정하다고(깨끗하지 못하다) 생각하는 유대인의 그릇된 관습에,
베드로는 지금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긋난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 같으면, 오히려 피하고 멀리 해야 할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는 일부러 그곳을 자기 유숙지로 정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당시 유대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면,
성경에 이 사실이 기록되었는가 하는 사실이다.
앞서 무어 선교사가 한국의 백정 신분해방을 위해 자기 몸을 던졌듯이,
행9장 욥바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악습타파와 복음 정신 회복을 위해 자기 온몸을 던지고 있다.
그 후로, 무두장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그릇된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는 사건으로 연결되다
대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를 방문해서 복음을 전한 사건은
일대 센세이션이었을 것이다.
그런 큰 사건도, 앞서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했기 때문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베드로 사도가, 무두장이 시몬을 무시하고 홀대하며 피했더라면,
그에게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전도하는 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보자기가 내려오는 꿈과 환상을 보았더라도, 그는 무시하고 말았을 것이다.
작은 일을 순종 못하는데, 큰일을 순종할 수 있겠는가?
시몬은 비록 무두장이였지만 엄연히 유대인이었고, 고넬료는 이방인이었다.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 <사회신분적 친민> 무두장이에게로 나아가다보니,
이제 <혈통적 천민>으로 취급했던, 이방인에게까지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베드로 한 사람이, 복음을 통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유대인 안에서 신분차별 철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 철폐라는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복음을 인해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변화가,
얼마나 큰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08.04.06.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http://blog.daum.net/rfcdrfcd/14539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