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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고전 13:4).
혹시라도 스스로를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자신에게는 특별히 악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해보나마나 실패입니다. 자기에 대해 희망을 거는 신자만큼 절망적인 신자는 없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신자만큼 희망적인 신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에 대해 관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편협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를 옳게 생각하려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한다는 것은 상대를 긍정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투기한다’는 단어를 들으며,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등장하는 사극에서와 같은 극심한 시기와 질투와 모함 등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투기란 그런 적극적 활동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게 평가하지 않으려는 우리 내면의 은밀한 성향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 부분을 읽을 때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바울은 지금껏 ‘…하며’ 하다가 여기에 와서 갑자기 ‘…지 아니하며’로 화법을 바꾼 것일까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며……”라고 말해도 의미가 통할 텐데 말입니다. 이것은 듣는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보다는 투기하는 것에 더 익숙한 존재임을 고려하였기에 나온 표현입니다. 인간에게 투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보여지는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 투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런 자연스런 인간관계의 방식을 거스르게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갖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뛰어난 것에 대해서 가지는 분노의 마음을 수그러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투기의 마음을 질투가 강한 성정의 사람들만이 소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투기의 마음은 사랑을 모르는 모든 마음에 도사린 특성입니다. 상황에 따라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기에 누그러지지 못하고 솟아올라 온 본성인 것입니다.
- 김남준 목사의 고린도전서 13장 묵상 사랑 중
부름 받아 나선 이 몸나무엔 나무엔 - Hymnal (찬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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