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심태윤의 힐링 고백
차인표, 신애라, 션, 정혜영, 주영훈, 이윤미, 박시은, 황보, 유선, 송은이, 리키김, 예지원…. 익숙한 이 이름들에는 몇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 하나는 모두 크리스천 연예인이라는 점, 둘은 그동안 갓피플 매거진이 만난 이들이라는 점, 그리고 셋은 대부분 한국컴패션을 알리려 결성한 음악밴드인 ‘컴패션밴드’의 멤버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넷이 또 있다. 이들을 두루 엮는 관계의 고리 가운데 가수 심태윤이 있다는 점이다.
컴패션밴드의 현재 리더가 심태윤인 탓이다. 이 말은 그동안 몇 백 회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2개의 컴패션밴드 음반을 기획하고 녹음 제작했을 때마다, 멤버들의 일정을 협의하고 마음과 몸과 시간을 모으는 복잡한 섬김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는 뜻이다.
2006년 배우 차인표를 중심으로 결성된 컴패션밴드에 심태윤이 동참하면서 초창기 리더였던 차인표가 그에게 2009년부터 리더십을 제안, 2010년부터 단독 리더로 섬겨왔다. 컴패션 후원자가 되고 밴드에 참가한 이래 지금까지, 각종 모임과 공연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할 수 있었던 점에 그는 무척 감사해한다.
심태윤은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재학시절 연기뿐 아니라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살려 서울예대 개그동아리(개그클럽) 공연에 음악으로 참여했고, 그 와중에 개그우먼 이영자에게 발탁돼 학생 때부터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TV 시트콤에도 출연했지만 음악을 하고 싶은 열망을 살려 2001년 1집 앨범 ‘Mr. 심태윤’을 냈는데,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당시 그가 ‘제2의 김건모’로 불렸다는 사실을 잘 안다. 외모와 음악 분위기도 김건모의 그것과 얼핏 닮았고 실력도 못지않았기 때문이리라. 음반을 낸 모태도 김건모, 신승훈, 박미경, 클론 등이 집결해 있던 당대 1위 기획사 라인 기획이었다.
이후 한동안 이름을 스테이(SYAY)로 바꿔 활동하며 드라마 ‘궁’의 OST를 만들어 유명해졌고, 그가 작곡해 2009년 황보가 부른 아리송(Arisong)은 한국 대중가요 최초로 영국 최대 댄스 음악 사이트인 주노다운로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가수이자 작곡가이고, 지금은 연예기획사(shimty entertainment) 대표이면서 클론의 구준엽과 함께 ‘심양’ 같은 식당을 예닐곱 곳에 경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한 그이지만, 삶의 우선순위는 연예계나 사업이 아닌 컴패션밴드에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언뜻 봐도 엄청 할 일 많고 시간도 부족해 보이는데, 그런 일들이 오히려 부업 같고 컴패션을 섬기는 일이 본업 같다는 말이다. 모태신앙으로 자랐으나 고교 시절 가출을 경험하고 젊은 시절엔 돈과 세상 문화에 빠져 있었다는 그가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을까?
글 : 이한민 | 도성윤, 심태윤
언젠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쓴 글을 미니홈피에서 봤습니다.
그거 오래 된 건데, 2007년일 거예요. 예배드리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에베소서 말씀을 들었는데, 부모님께 죄송하고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그 글, 사실은 그때 영암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에요. 성북구 안암동, 대광고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제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다니며 자란 곳이죠. 아버지 어머니도 어려서부터 다니셨고, 그 교회 장로님 권사님이시거든요. 두 분 다 부모님이, 그러니까 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북 출신이시고 할머니가 대광초등학교 선생님이셨어요.
저는 중등부 형들이 기타치고 찬양할 때 주찬양선교단의 노래 배우고, 저도 문학의 밤 세대잖아요.
나중에 음악 하게 되면 나도 꼭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을 만들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저희 부모님이 날마다 가정예배 드리시고 믿음이 있으시지만 자녀양육에 대해선 요즘 같지 않으시고 ‘행복은 성적순’을 따르셨어요. 훌륭한 부모님이시지만 아버지가 아빠 없이 자라 롤모델이 없으셨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커서 이해했는데, 그땐 좀 답답했어요. 어머니도 저랑 놀아주기보다 공부시키고 뒷바라지 하는 게 사랑인 줄 아셨거든요.
중학생 때까진 공부도 조금 했는데 동성고등학교 다닐 때 중창단 오디션 봐서 합격해도 부모님은 물론 선생님까지 못하게 하셨어요. 결국 일탈을 꿈꿨고 한 달쯤 가출을 했어요. 친구 집에서 담배 배우고 헤비메탈 음악 듣는데, 그땐 그게 멋있어 보였죠. 교회에서 갇혀 지내는 것 같은 게 지겨웠거든요. 그러니 고등학생 때 공부와 신앙에서 멀어지고, 모태신앙이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이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차인표 형님 만나고 컴패션밴드 하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이제는 매일 기도하고 예배하고 큐티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니까, 부모님의 교육이 그 어떤 교육보다 최고였단 걸 알게 됐다고 그 글 쓰며 고백했던 거예요. 제가 그토록 방황하고 암울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부모님이 매일 저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 기도 덕분에 제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지금은 무척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어 감사하다고 썼더니, 아버님 어머님이 살아오시면서 그 글 보신 게 가장 기쁘고 자랑스러웠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연예활동 한창 할 땐 혼자 강남에서 살았었는데, 올해 초 결혼해서 나가기 전까지 최근 몇 년간은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기도 했지요.
연예계 입문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스무 살이 됐는데 대학교도 성적이 안 되니까 당연히 다 떨어졌어요. 1년 동안 스파르타식 재수학원 가서도 놀았죠 뭐. 그러다 우연히 친구 따라 서울예대 연극과 지원했는데 그때도 경쟁률이 50대 1은 됐나, 치열해서 거기도 떨어졌죠.
원래 꿈은 대학가요제 나가는 것이었는데, 꿈이 좌절됐으니까 ‘이제 나는 뭐 하나’ 생각하다 방에서 모처럼 기도를 했어요. “제가 이렇게 대학교 다 떨어졌지만 감사해요. 앞으론 제 인생이 하나님 뜻대로 잘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기도 끝나자마자 예비합격자로 붙었다고 전화가 오더라고요!
저는 대학 가서 유명해진 스타일이에요. 연극과 학생이지만 음악도 만들고 기획력도 있어서 친구들이 뮤지컬 하면 음악감독도 하고요. 그때 함께 했던 친구와 후배들이 지금 현역에서 유명한 뮤지션들이 되어 컴패션밴드 앨범 만들 때도 많은 도움이 됐는데요, 컴패션밴드 2집 때 참여해준 가수 김범수도 그때 후배였고요.
학교에서 개그동아리 공연하는데 이영자 선배님이 최고 전성기였을 때 제 공연을 보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학생 때 데뷔하게 된 거예요. 그때 기획사를 차리셔서 제게는 첫 사장님이 되신 건데, 코미디 시트콤 ‘금촌댁네 사람들’에서 홍진경 씨 따라다니는 역할도 했죠. 저는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계속 그러기가 그래서, 거길 나와 당시 가요계의 톱이라는 프로듀서 김창환 씨에게 오디션을 보고 김건모, 박미경 씨가 소속된 회사로 옮겼던 겁니다.
김건모를 이을 신인이 나온다고 다들 기대가 많았어요. 뮤직비디오만 다섯 개를 찍고 데뷔무대에서 사회를 보던 이휘재 형이 백댄서를 해주기도 했어요. 친했으니까. 저도 이쯤 되면 백만 장 팔리는 가수가 될 줄 알았거든요. 한 십만 장 음반이 팔렸는데, 투자대비로 보면, 상대적으로 저는 망한 거죠. 반응이 그 정도로 뜨겁진 않았거든요.
그리고 3년 정도 활동했나? TV 나가 개그맨처럼 웃기기도 해야 하니까,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하는데, 그때는 어려서 음악 하는 사람으로만 보이고 싶던 터라 나중엔 싫더라고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예명을 스테이로 바꾸면서 드라마 OST를 만들었어요. 윤은혜가 황실 여고생으로 나오는 ‘궁’의 주제곡 가운데 ‘당신은.... 나는 바보입니다’가 유명해졌고 한류드라마 첫 스타트로 유명해져 외국 가수가 제 노래를 부를 정도였어요. 한 2년 스테이로 살았죠. 생업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어 압구정동에 식당도 차렸고요.
일찍부터 그렇게 톱스타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누리는 걸 같이 누려봤지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선배님들도 보면서 인기와 명예에 더 갈급해졌어요. 돈도 벌었지만 상대적인 빈곤감에 허덕이고 감사하지 못했던 거죠. 주변 사람들이 다 백만 장 팔린 가수들이었으니까.
컴패션밴드는 어떻게 연결이 된 건가요?
저는 노는 걸로 유명했어요. 옷도 최신 유행만 찾아 입고, 국내는 고사하고 외국에서도 첨단이라는 브랜드를 구해 입곤 했어요. 지금은 보시는 것처럼 검정색 티셔츠 한 장 차림으로 편하게 다니지만 그땐 끝이 없었죠. 인기 같은 스트레스를 놀고 소비하는 걸로 풀고 싶었나 봐요.
사람들은 제가 그러니까 행복하고 풍족한 줄 알았겠지만 사실 정신적으로는 그러지 못했어요. 밤새워 클럽에서 놀고 술 마시다가도 주일이면 왠지 불안한 마음에 습관적으로 교회는 갔어요. 부모님이 다른 건 몰라도 주일 성수는 꼭 하길 원하셨으니까. 제 아버지가 평생 새벽기도를 다니시는데, 저는 밤새 술 먹고 놀다 새벽 4,5시에 양치질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교회 가시다가 서로 마주치기도 하고요.
2007년 어느 날, 헬스장에서 구준엽 씨랑 운동을 하고 있는데 차인표 선배님이 지나가시면서 저 말고 구 씨에게 먼저 이러셨어요. “컴패션이란 곳이 있는데 성경공부 하고 봉사활동도 하니까 한번 오라”고.
저하고는 아직 친하지 않았을 때라 (예의상) “시간 되면 같이 오세요” 하는 정도였고, 그런데 교회는 정작 내가 다니는데 말이죠! 나중에 주영훈 씨도 컴패션 이야기를 또 하는 거예요. 가벼운 마음으로 황보 씨랑 같이 갔어요. 황보는 제게 연예계의 여동생이니까.
강남 어느 교회에서 컴패션밴드 공연을 하는데 서정인 목사님(컴패션 대표)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설교를 하셨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낮은 곳을 섬기는 일이고, 한 아이를 살리는 일이 이렇게 가능하고 행복한 일이라는 걸 느끼니까 제가 너무 창피한 거예요.
하필 그 모임 가기 전날 그 동네에서 밤새 술 먹고 놀았거든요. 공연 때도 얼굴 가리고 있었는데, 환송인사를 하자고 대원들이 컴패션 팻말 들고 같이 서 있자는데 안 할 순 없고, 저는 팻말로 얼굴 가리고 있었어요. 누가 알아볼까봐 창피해서. 그게 컴패션 활동의 시작이었어요. 그때 얼굴 가리던 모습을 인표 형이 기억하더라고요.
차인표 씨는 황보랑 제가 두세 번 오다 말 줄 알았답니다. 그 뒤부터 모임이랑 연습에 참여했는데, 지금까지 8년째 저만 유일하게 거의 한 번도 안 빠질 수 있었어요. 제가 원래 한 가지 일을 꾸준히 오래 못하거든요. 그런데 거기 가니까 위로도 되고 좋더라고요. 차인표 씨 같은 존경할 어른들도 많고, 그 ‘바닥’에서 저처럼 살다가 돌아온 탕자들도 많았고요.
하나님을 만난 곳이 컴패션에서였나 봐요.
그 이듬해인가 컴패션의 비전트립으로 후원하는 아이들을 만나러 방글라데시로 갔어요. 황보 씨랑 엄지원 씨랑 대여섯 명이 갔는데, 가정방문을 했거든요. 쓰레기마을에 갔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됐나, 어떤 남자아이가 제 손을 딱 잡더라고요.
서정인 목사님이 제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주시더니 찍어주래요. 아이 손 잡고 셀카를 같이 찍었는데 아이가 그걸 받더니 한손엔 그 사진 들고 한손으론 제 손을 놓지 않고 1시간 가까이나 마을을 함께 걸어 다녔어요.
그 아이에겐 제가 산타할아버지 같았나 봐요. 헤어지려는 때 갑자기 그 아이가 저를 꽉 안으면서 엉엉 우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도 다 울었죠. 그런데 말예요, 저를 안아주는 그 아이 힘이 너무 센 거예요. ‘어쩌면 이렇게 세게 안을 수 있지? 사람 힘이 아닌 것 같아. 이게 뭐지?’ 생각하는데, 신기하게도 어릴 때 어머니가 나를 낳고 처음 안으실 때가 꼭 이랬겠다 싶은 그 느낌이 생각났어요.
이건 이 아이가 나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 아이를 통해 나를 안아주시는 것이란 걸 안 것이죠. 물질과 명예로 채우려고 했던 제 마음을 그 아이가 거꾸로 저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면서 채워준 거죠.
아이와 헤어지고 저는 버스 차창으로 손을 흔드는데, 그 아이는 한참을 쫓아왔어요. 손에 든 사진 보다가 멀어지는 나를 바라보기를 번갈아 하고 뛰면서 손을 흔들어주는 거예요. 저에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준 그 아이 이름, 지금도 저는 몰라요. 그런데 그 아이는 저랑 같이 찍은 그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보면서 저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나 싶더라고요. 한국에 돌아가서 돈이나 벌고 또 흥청망청 쓰기나 하고,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 고민이 시작됐어요.
그리고 돌아와서 말씀을 보고 날마다 큐티를 시작하게 됐어요. 이제 매일 큐티를 안 하면 저는 안 돼요. 그리고 컴패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이죠. 차인표 씨가 4년 정도 리더를 했고 2010년부터 지금까지 제가 맡고 있습니다.
컴패션밴드의 리더는 어떤 자리입니까?
저는 처음부터 못한다고 했어요. 회사라면 수직관계가 있지만 컴패션밴드에서는 다르거든요. 리더는 가장 먼저 와서 문 열고 제일 늦게 나가고, 설거지와 쓰레기 치우는 건 기본이에요. 차인표 씨가 그러셨거든요.
멤버 가운데 연예인도 많으니까 행사 한번 하려면 각자 스케줄을 맞춰야 해서 서로 멤버이면서도 구걸하다시피 일정을 조절해야 해요. 온갖 심부름도 하고 연예인도 상대할 만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딱히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라는 확신이 제겐 있었어요. 일이 아닌 사역이니까요.
컴패션밴드 단원이 되면 생업 이외에 컴패션 사역을 일순위로 하자는 약속을 해요. 컴패션의 모토대로 ‘꿈을 잃은 어린이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니까요. 제가 하는 기획사에 황보 씨가 소속돼 있는데요, 제가 사장이니까 컴패션 일정이랑 행사 일정이 겹치면 웬만하면 컴패션 일을 먼저 하도록 해요. 식당 사업도 좋은 시스템과 매니저를 세워 맡겨놓고 있고요. 돈보다 생명 살리는 사역이 더 중요하게 됐으니까요.
올해 띠동갑 자매랑 결혼을 하셨어요.
옛날엔 결혼 생각을 안 했어요. 어려서 여동생 둘 괴롭히기만 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이 혹시 못된 오빠 때문에 상처받아 결혼 안 하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한번은 미안하다는 편지를 썼어요. 그런데 아니라고, 사과해줘서 고맙고 이젠 괜찮다면서 교회에서 결혼할 남자친구 생겼다고 제게 먼저 인사 시켜주더라고요.막내동생도 결혼해서 잘 살고 조카가 너무 예쁘고, 또 주변에 신애라 형수님이랑 션 형님 가족이랑 아기들 볼 때마다 부럽고, 나도 이젠 하나님 안에서 좋은 가정 꾸리고 싶어지더라고요.
이왕이면 믿음 좋고 예쁘면 좋겠다고 기도 시작했는데, 하루는 회식 자리에서 무용(발레)을 한다는 어떤 아가씨가 자기는 ‘사역’할 때만 춤을 춘다는 말을 해서 귀가 쫑긋했어요. 그냥 연예 지망생인 줄만 알았거든요. 알고 봤더니 컴패션밴드의 무용 지도자가 그 자매가 함께하는 몸찬양팀의 리더이더라고요!
물어보니까 예수님밖에 모르는 아이라고…! 더 신기한 건 저에게 그 자매를 소개해줄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고요. 석 달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 교제했는데요, 결혼식을 예배로 하고 싶다고 해서 정말 가까운 친인척만 모시고 조용하게 치렀습니다.
요즘 기도제목은?
아내는 가정사역이 1순위라고 해요. 저도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됐으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잘 꾸려갔으면 좋겠고요. 이제 결혼했고 아기도 생길 거니까 가족이 같이 나갈 교회공동체를 새롭게 찾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아내가 옛날부터 좋아하는 박영선 목사님의 제자인 김남국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주내힘교회가 집에서 가깝더라고요. 이성미 집사님을 통해서도 알게 돼 등록하려는데요,
그리고 컴패션밴드 리더로서 어린 생명을 살리는 컴패션의 사역을 알리는 컴패션밴드의 사역을 잘 감당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한 어린이를 돕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고, 갓피플 여러분도 이 좋은 일에 동참해 함께 행복해지면 좋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