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Posted at 2015.12.26 22:03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믿음의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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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인물탐구/김익두 목사한국기독교 인물탐구/김익두 목사

Posted at 2014.04.28 22:49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믿음의사람들

한국기독교 인물탐구/김익두 목사

김익두 목사와 김익두 목사의 군산집회광경(1930년)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주장한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 믿고 새 사람 됐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날 그릇된 삶을 살다가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사람도 있다. 그들의 간증을 듣노라면 신앙의 위대한 힘에 감동받는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다. 어려움이 닥치면 예전의 악습이 나타나 다시 죄악의 길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죄악 된 행실을 끊고 새 사람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델인간은 많다. 예수 핍박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어 기독교를 일으킨 위대한 전도자가 되고, 순교자가 된 것처럼 ‘개망나니’로 불리던 김익두(1874~1950)도 목사가 되어 우리나라 개신교의 위대한 전도자가 되고, 순교자가 되었다.


개망나니로 살다 예수믿고 새사람 돼


김익두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에서 아버지 김응선(金應善)과 어머니 전익선(田益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익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아들 김익두에게 희망을 걸었던 부친은 몸져누웠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시장에서 일하던 김익두는 안악읍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사람의 돈 보따리를 주워 돌려주었고, 주인은 김익두를 자신의 상점 점원으로 채용했다. 생활이 안정된 김익두는 이웃 마을 처녀와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어 모든 재산을 잃고 말았다. 낙망한 김익두는 술로 살면서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불량배들과 패싸움을 벌리고, 사람들을 괴롭혔다. 사람들은 그를 ‘개망나니 익두’라느니 ‘안악골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불꽃같은 그의 열정이 빗나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김익두는 건달처럼 행동했지만 의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망나니처럼 살고는 있었지만 ‘진리’를 찾아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한때 불교 사찰에 들어가 얼마 동안 불도에 심취하기도 했다. 27세 되던 1900년 봄, 김익두는 친구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는 금산교회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스왈렌(William Swallen) 선교사가 전도지를 주며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하자, 전도지에 코를 풀어 길바닥에 내팽개친 적이 있었다. 그때 스왈렌 선교사가 던진 한 마디가 교회를 찾게 한 계기가 되었다.

김익두는 예배당에 나가면서 술을 끊었다가 친구들의 유혹에 빠져 술을 마시고 만취해 집에 돌아와서 괴로워하던 중 비몽사몽간에 ‘불덩어리가 가슴 속에 떨어지는’ 신비체험을 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901년 김익두는 어머니와 부인과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기도와 성경탐독생활을 계속하는 한편 동네마다 다니며 전도하였다. 영원한 진리를 찾은 김익두, 변화된 김익두는 그동안 자신의 그릇된 삶을 애통하며,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찬송을 부르고 전도했지만 사람들은 김익두가 ‘정신이 이상하게 되었다’, ‘예수 귀신에 씌웠다’고 욕하며 핍박했다. 사람들은 김익두의 변화를 믿으려하지 않았다. 마침내 김익두는 동네에 “김익두 죽다”는 방을 붙이기에 이른다.


회개와 구원눈물 대중에게 옮겨붙어


김익두의 완전 개과천선을 입증하는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는다”는 유명한 일화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어떤 사람이 김익두가 정말 죽었는가 시험하기 위해 김익두의 얼굴에 구정물을 퍼부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이내 감정을 다스리고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익두가 전도사시절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고개 너머 교회로 가다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취객이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며 시비를 걸고 때렸다. 김익두는 아무 말 없이 맞고 있다가 자신이 김익두라고 말하자, 취객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이때 김익두는 이 말을 하고는 취객을 부흥회에 데리고 갔고, 그는 후에 예수 믿고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익두는 세례받기까지 매일 목욕한 후 성경을 읽었고, 2년 동안 아내와 따로 방을 쓰면서 성스런 생활을 했다. 스왈렌 선교사의 지도를 받은 김익두는 1903년 신천 서북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907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 1911년 제3회로 졸업한 김익두는 그 해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신천서북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김익두 목사가 본격적으로 부흥사역에 나서게 된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였다.  이후 그의 부흥운동은 약 20년 동안 전국을 휩쓸었고, 시베리아와 일본에까지 성령 폭발을 일으켰는데, 이는 부흥회 방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적이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설교내용은 예수의 십자가와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의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이었다. 1920년 6월 평양의 연합부흥집회에는 3천 명을 수용하는 장대현교회당이 좁을 정도로 대중이 몰려들었고, 같은 해 10월 서울승동교회에서 열린 일곱교회 연합집회에는 1만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김인서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대정 9년[1920년] 여름이라. …사람들은 새벽기도회에 모이면 회개하여 울고 슬퍼 울었나니 울고 울어 눈물의 집회가 되었고 낮 공부에 모히면 두려운 기운에 잠기었고 저녁에 모히면 웃고 또 울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힌 때문에 다수의 회중은 김[익두]목사의 말을 잘 듣지도 못하면서 김 목사의 모양만 보고 웃고 또 울었다.”

김익두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는 웃음과 울음이 반복, 교차되는 특이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 자신의 패악과 구원이 예수 십자가고난과 부활로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성경 읽은 은혜보다 큰 은혜 없었다”


김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치유를 받은 사람과 은혜 받고 거듭난 사람은 수없이 많다. 김 목사가 가진 부흥회 집회는 대략 776회, 설교회수 2만 8천회, 교회신축 150개소, 유치원 120개소를 세웠다. 또한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명이나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박사 남궁혁도 1917년 광주부흥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되었고, 신학자 김재준 목사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1920년 5월 27일 아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 참석한 주기철은 김익두 목사의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김익두 목사는 신약성경을 100번 읽은 후 세례를 받았다. 성경읽기는 평생 이어졌다. 그는 구약성경을 1백 번, 신약성경을 1천 번 읽었다고 한다. 김익두 목사는 눈물로 성경을 읽은 사람이다.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의 심정을 읽었다.

“나는 4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한 번도 울지 않은 적이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 그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신 장면을 상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성경 글씨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금식도 많이 해보고, 이적도 많이 체험해 보고, 부흥집회도 많이 해보았으나 성경을 읽어 얻은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1950년 10월 14일 김익두 목사는 신천서부교회에서 패주하는 공산군에게 피살당했다. 순교 당일 신도 한춘근(김익두 목사의 업적과 일대기《내 영혼을 받으소서》저자)이 인민군이 교회로 올 것이니 피하라고 애원했으나 김 목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기도회를 마치려는 순간 공산군들이 들이닥쳐 김 목사에게 총을 들이댔다. 김 목사는 이날 신도 5명과 함께 순교했다. 그 해 11월 29일, 김 목사의 시체는 안악으로 가는 고개 넘어 산중턱에 안장되었다.

김 목사에 대해 좋지 않은 평도 있다. 미신적 신앙소유자, 무식한 목사, 신사참배자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의 심정을 체휼한 진정한 예수 제자였다. 김익두를 위대한 목사로 만든 것은 한 때의 패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김익두 목사는 생전에 설교집 1권을 남겼다. 1940년 3월 신문당(新文堂)에서 펴낸106페이지의 소책자로, 13제목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다.

<目次> 1. 서로 사랑하라 2. 聖神을 받으라 3. 主日을 거룩되히 지키자 4. 祈禱 5. 十字架의道 6. 聖經은 하느님의 말씀 7.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되는 증거 8. 信者의 즐거움 9. 연약한것을 면하고 신령해지자 10.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1. 謹愼 12. 깨달음 13. 順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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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사람들 - 사무엘 무어 조선을 뒤집어 놓은 선교사믿음의사람들 - 사무엘 무어 조선을 뒤집어 놓은 선교사

Posted at 2014.04.16 08:23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믿음의사람들

조선을 뒤집어 놓은 선교사 사무엘무어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겠네요.


◈한국 백정들을 해방시킨 사무엘 무어(모삼열) 선교사     행9: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행9:43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뀌어 질 때

그 결과는 엄청나다. ‘단 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단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으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그 시대와 사회의 병든 부분이 치유되었다.

지난 2천년 교회 역사가 그것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데...



◑한국의 백정을 해방시킨 사무엘 무어 선교사 (모삼열 牟三悅)

 

    사무엘 무어 선교사


▲무어 선교사가 백정 박 씨를 전도하다.

이곳 양화진에 묻혀 있는 선교사님들 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은

사무엘 무어 Samuel F. Moore 선교사이다.


1892년 32세의 나이에,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뎠던 무어 선교사는

당시 서울의 곤당골(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곤당골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 안에 ‘예수 학당’을 설립해서, 조선인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수 학당’에는 ‘봉줄이’라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봉줄이는 백정 박 씨의 아들이었다.

(당시 백정에게는 성性만 있었지, 이름은 없었다. 매우 천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무어 선교사는, 봉줄이 아버지 백정 박씨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로 무어 선교사는 백정 박 씨의 집에 찾아가 문병했다.

그리고 동료 의료선교사 에이비슨에게 부탁해서, 백정 박 씨를 치료해 주었다.


에이비슨 선교사(제중원 4대 원장)는 당시 고종황제의 주치의였고, 후에 세브란스의대를 설립했다.

에이비슨 선교사의 수차례에 걸친 왕진 끝에, 백정 박 씨는 살아나게 되었다.


이제 완쾌된 백정 박씨는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무어 선교사는 그를 환대했다.

그는 후에 ‘박성춘’이런 이름도, 무어 선교사로부터 얻었고,

선교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백정 출신의 박성춘 때문에 곤당골교회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양반 교인들이, 천한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항의였다.

양반 교인들은, 무어 선교사에게, 그 백정을 교회에서 내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교회 출석을 거부했다. (당시 사회 관례상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양반 교인들을 만류했다.

그러나 양반 교인들은 강경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양반 교인들의 대표가 무어 선교사를 찾아왔다.

곤당골교회의 예배당 앞자리에 양반들을 위한 좌석을 별도로 마련해 주고,

백정을 그 뒷자리에 앉힌다면, 다시 교회에 출석하겠노라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어떤 경우에도

그런 차별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그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은, 마침내 곤당골교회와 결별해서

양반들 자신들만 모일 수 있는 홍문동교회를 설립했다.


▲박성춘, 백정들을 전도하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가장 입장이 난처해진 사람이... 백정 박성춘이었다.

자기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양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백정 박성춘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무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 시내의 백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원에 있는 백정들에게까지 찾아가서

‘백정을 사람대접해 주는 데가 있으니, 그 교회로 나오라’고 전도했다.

그래서 백정들이 ‘곤당골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시 교회가 합쳐지다

그 이후에, 곤당골교회에서 떨어져나간 양반교회, 즉 홍문동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들은 회개한 뒤에, 다시 무어 선교사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곤당골교회와 홍문동교회가 합쳐져서

1898년에 ‘중앙교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오늘날 승동교회의 전신)


그 때 중앙교회에 출석하는 1백여 명의 교인들 가운데,

무려 30명이 백정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교회를 가리켜 ‘백정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분 차별을 철폐한 중앙교회(곤당골교회)

몇 해 후에 백정 박성춘이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족이었던 이재형도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왕족, 양반, 백정이 명실상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는

진정한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차별 없는 복음’만을 믿었던,

즉, 예수님은 인간을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는 신념만을 굳게 믿었던

무어 선교사의 덕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어선교사는 당시 조선의 남녀차별, 부인학대 문화를 교정하고자 무지 애썼다.)


▲조선에 노예해방 운동을 펼치다

그 후에 백정출신 박성춘 장로는, 무어 선교사의 지도 아래

조선의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조정에 수차례 탄원서를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의 백정들은, 신분해방의 감격을 맛보게 된다.


백정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얻어서

-‘민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양반처럼 망건과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법률적으로 다른 모든 국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110년 전 조선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무어 선교사 한 사람이 생각과 마음을 굳게 고쳐먹고

온갖 반대와 위험을 무릅쓴 결과였다.


그러므로 마르다 허틀리 여사가 자신의 저서「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에서

무어 선교사에 의한 조선의 백정의 해방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고 명명하면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기쁨은

한국 백정들의 기쁨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 라고 책에 기술했다.


이처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차별 없는 복음을 증거 했던 무어 선교사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서 46세로 소천 하셨다. 묘소는 양화진에 안치되었다.

무어 선교사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 디딘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1904년 중앙 교회는 인사동(현 승동교회)으로 옮겼다. 인사동의 당시 교회 사진

 

▲한 사람의 헌신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었을 때

그 한 사람으로 인해 한 사회의 병든 부분이 새로워지는데

그 14년은 충분히 긴 세월이었다.

바로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를 통해 14년간 계속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무어 선교사는 조선 땅에서 태어난 조선인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 조선은 그에게 이방 땅, 이방 민족이었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었을 때,

그 미국인 한 사람으로 인해서

수 백 년 동안 이 땅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백정들이 해방되는

출애굽의 大역사가 일어났다.


▲백정의 아들도 신분차별의 벽을 뛰어넘다.

봉줄이로 불리던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의 아들 역시,

박서영이란 어엿한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는 후에 제중원 의학원(세브란스의대 전신) 1회 졸업생이 되어서

그 뒤 10년 동안 에디슨 선교사와 함께, 의대 교수로 재직했다.


백정이 인간 취급을 못 받았기 때문에

백정의 아들 역시 인간 취급을 못 받던 사회였다.

그런데 인간일 수 없는 백정의 아들이 의대 교수가 되어,

당시 조선 사회의 최고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된 이야기가, 설교 몇 년 후에 <제중원>이란 SBS드라마에 소상히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무어 선교사에 의한 그 백정해방운동이

당시 조선사회와 조선인의 의식 변화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

양화진 외국인 묘지 A구역에 있는, 무어 선교사의 비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忠僕: 충성스런 종


예수 안에서, 예수 때문에, 예수를 힘입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은 무어 선교사는

자기 한 사람의 변화가,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새 역사를 써내려갔다.


여러분과 나,

연약한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예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새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다.

 

2천 년 전에 베드로도 그랬는데...



◑무두장이 집에 머물렀던 베드로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유하니라 행9:43


성경에 베드로가 그냥 ‘욥바의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고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다고 특별히 기록한 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별히 시몬이 무슨 ‘백부장, 부자, 관리, 학자’ 등 내세울만한 직업도 아닌데,

시몬이 무두장이라고 굳이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두장이는 당시 천대받던 직업, 한국의 백정처럼! 

욥바의 많은 신자들은, 대사도 베드로를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 사도는, 모든 청을 다 거절하고,

굳이 무두장이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가죽 세공업자인 무두장이를 최하층 천민 취급했다.

이유인즉, 무두장이는 가죽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죽은 동물의 시체(부정한 것)를 만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몬의 집이 바닷가에 있었다고 했는데, 행10:6

어부도 아닌 무두장이가 바닷가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욥바의 유대인 사회가 그 무두장이를 소외시켰을 수도 있고,

자기가 스스로 소외되었을 수도 있다.


희한한 것은,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부정하다고 여기고,

무두장이가 손을 댄 모든 물건 역시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그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제품만은, 부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부정하기는커녕, 무두장이가 만든 가죽제품을 오히려 귀중품으로 다루었다.

즉, 이율배반적이었다.


▲대사도 베드로가 굳이 무두장이의 집을 유숙지로 선택한 이유

유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베드로는 ‘복음 안에서 신분 차별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두장이를 부정하다고(깨끗하지 못하다) 생각하는 유대인의 그릇된 관습에,

베드로는 지금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긋난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 같으면, 오히려 피하고 멀리 해야 할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는 일부러 그곳을 자기 유숙지로 정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당시 유대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면,

성경에 이 사실이 기록되었는가 하는 사실이다.


앞서 무어 선교사가 한국의 백정 신분해방을 위해 자기 몸을 던졌듯이,

행9장 욥바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악습타파와 복음 정신 회복을 위해 자기 온몸을 던지고 있다.

그 후로, 무두장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그릇된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는 사건으로 연결되다

대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를 방문해서 복음을 전한 사건은

일대 센세이션이었을 것이다.

 

그런 큰 사건도, 앞서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했기 때문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베드로 사도가, 무두장이 시몬을 무시하고 홀대하며 피했더라면,

그에게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전도하는 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보자기가 내려오는 꿈과 환상을 보았더라도, 그는 무시하고 말았을 것이다.


작은 일을 순종 못하는데, 큰일을 순종할 수 있겠는가?

시몬은 비록 무두장이였지만 엄연히 유대인이었고, 고넬료는 이방인이었다.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 <사회신분적 친민> 무두장이에게로 나아가다보니,

이제 <혈통적 천민>으로 취급했던, 이방인에게까지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베드로 한 사람이, 복음을 통해 자기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유대인 안에서 신분차별 철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 철폐라는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복음을 인해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변화가,

얼마나 큰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08.04.06.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주제별 분류]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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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 - 01편 주기철 목사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되다믿음의 사람들 - 01편 주기철 목사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되다

Posted at 2014.03.09 09:04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믿음의사람들



로마서 8장18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장31 ~ 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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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라는 이름 - 토마스선교사 이야기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겠네요.선교라는 이름 - 토마스선교사 이야기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겠네요.

Posted at 2014.03.06 08:41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믿음의사람들


19편 토마스 선교사 은자의 나라, 조선을 향한 부르심


20편 토마스 선교사 대동강가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우리나라에 온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순교자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1840-1866)이다.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선교사님은 1863년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상하이로 갔다.

 

  그런데 부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곧 병사하고,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르 선교사와의 불화까지 겹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청나라 해상 세관의 통역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푸라는 곳에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중국에 와 있던 김자평, 최선일이라는 천주교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선교를 결심한다.

 

  1865년 9월 서해안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 동안 인근 선진포, 석호정, 만경대 등을 돌며 한국말을 배우기도 하고 1백여 권의 성경을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1866년 1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866년 8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푸지부의 후원을 받아 통역사 자격으로 미국 국적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하여 대동강으로 다시 돌아왔다.  당시 조선은 거듭되는 외세 열강들의 침입이 계속되고 있었고, 또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맞물려서 그 어느 때보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나쁜 시기였다.

 

  1866년 8월27일 평양의 한 포구에 정박한 셔먼호는 조선을 향해 강력하게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하고 총과 포를 쏘아 사상자를 내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9월2일에 양각도의 모래톱에 배가 좌초되었는데, 이 때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하여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하자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토마스 선교사도 이 때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그 때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병사 박춘권이란 사람이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 선교사에게서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인들이 되었다. 그를 죽였던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립하였다.

 

  받은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아 널다리교회를 세웠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 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 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2일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출처: cafe.daum.net/churchfellowship   대한예수교장로회독립총회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레포트 자료)

 

  귀츨라프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지 34년 후인 1866년, 영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 젊은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崔蘭軒) 선교사였다.

 

 

  그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New College, University of London)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철저한 신앙과 선교의 사명감으로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1863년 6월 4일이었다.

 

  그는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두고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던 해에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 하겠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가, 현지 런던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아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로 가서 세관에 취직하여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로 온 토마스를 방관하실 수는 없었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재충전 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들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윌리엄슨이었다.

 

  1865년 가을, 한국에서 온 목선 한 쌍이 지푸에 나타났는데 그 안에 사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에까지 온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염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메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슨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나 성경지식이 아주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종교적인 형편과 국내 실정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은 토마스는 한국 선교를 추진할 것을 다짐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1865년 9월 4일 조선으로 향하는 배가 있어서 토마스는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엄슨이 전해 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소속 선교사로서 서해안으로 떠났다.

 

  1865년 9월 13일 항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1866년 1월 초에는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런던선교회로부터 그의 새 임지로 북경이 정해졌음을 통고받았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런던선교회 총무 티드맨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한국 선교 보고서를 보냈다.

 

  “우리는 한 작은 중국 목선을 타고 9월 4일 지푸를 떠났고 한국 해안에 도착한 날은 13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해안에서 2개월 반 동안 머물렀습니다. 나는 한국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그 불쌍한 백성들에게 복음의 가장 귀중한 진리 중 얼마를 가르치기에 넉넉한 한국말을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백성으로 말하면 대체로 외국인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나, 나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책 한 두 권씩을 받도록 권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책을 받을 때에는 사형을 당하든지 아니면 벌금형이나 투옥될 것을 각오하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책을 얼마나 읽기를 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면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었다. 이 접촉을 통해 그는 지난해 한국에서 전했던 성경이 평양에까지 흘러들어 갔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확인은 한국에 대한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기회만 있으면 한국에 달려가려고 하였다.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의 원정이 논의되었을 때 토마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로즈 제독이 거느린 프랑스 함대가 인도지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었으므로 그의 한국행은 무기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천진을 거쳐 지푸에 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된 토마스는 실망이 컸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배를 타고 한국 선교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는 미국 프레스톤 소유로서, 중무장한 일종의 상선이었다. 셔먼호에는 배 소유주 미국인 프레스톤이 영국의 메도우 상사와 함께 조선과의 통상의 길을트기 위해 선적한 면포, 유리그릇, 철판, 자명종 등 많은 상품과 선장 미국인 페이지(Page), 영국인 선원 호가쓰(George Hogarth), 항해사 미국인 윌슨(Wilson) 그리고 토마스 등 5명의 서양인과 청나라와 말레이시아인 19명의 동양인이 승선하고 있었다.

 

  1866년 8월 19일 셔먼호가 송산리 앞바다를 떠나 황주 송림리 연봉포로 올라오자 정부는 급보를 전해 듣고“요새 이상한 배가 우리 바다에”많이 나타나니“행동이 수상한 무리를 살피고 국방을 엄히 하라”는 특명을 하달했다.

 

  황주 목사의 입국 불가 전갈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 밤 토마스와 그의 일행을 태운 셔먼호는 드디어 대동강 입구, 용강군 다미면 상칠리 주영포를 거쳐, 25일 평양을 향해 강 상류로 계속하여 거슬러 올라와 평양부 초리방 일리 신장포(草里坊一里新場浦)에 닻을 내렸다.

 

  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평양 감사 박규수는 급히 중군 이현익, 군관 방익진, 평양부 서윤, 신태정을 파송해 상선의 입국경위와 정황을 알아보도록 보냈다. 토마스는 입국의 목적이 통상과 선교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자신들은 천주교가 아니라 야소교(耶蘇敎) 신자들이라고 전해 주었다.

 

  왕조실록에 있는 대로 토마스는 문정관에게“백서에 덕이 되고 인성(人性)에 선이 되는 진도(眞道)가 야소교(耶蘇敎)에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국책으로 삼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문정관은 그들에게 외국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탐문을 통해 한국 측은 이 배가 산동 반도를 떠나 백령도를 거쳐 평양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통상 및 야소교 전파를 목적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가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은 한국 관민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처음에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친절을 보이던 한국 측도,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은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에 셔먼호에서도 위협을 느껴 병졸들과 성민들을 향해 소총과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면서 셔먼호가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상류에서 병졸들은 작은 배들을 여러 척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거기에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자 이 불타는 작은 배들이 떠내려가 셔먼호에 닿아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배가 불타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이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은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병졸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가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 성경 한 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는 받지 않았다가 되돌아갈 때 이것을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안주(安州)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남장로교 선교사 레널즈(William Reynolds)의 조사가 되었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장사포에서 성서를 받은 소년 홍신길, 석정호에서 성서를 받은 김영섭과 김종권, 만경대에서 성서를 받은 최치량 등도 후에 강서와 평양 판동교회의 창설자들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칼을 맞고 개신교 목사로서 이 땅에 최초의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시고 산 많은 평양 성민들이 예수를 믿어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는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한 터툴리안의 말이 한국교회사에도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1927년 5월 8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토마스가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대동강의 쑥섬에 모여 기념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33년 9월 14일에는 기념 예배당이 준공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순교적 신앙은 후대의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순교정신은 한국교회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와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진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든 신앙적 지주가 되었다. 또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과 선교회들은 한국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출처 : 합동총회주신학교 http://cafe.daum.net/wj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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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라는 이름 - 이기풍목사 이야기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겠네요.선교라는 이름 - 이기풍목사 이야기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겠네요.

Posted at 2014.02.27 08:39 | Posted in 마음으로기도하며/믿음의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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